끝을 알 수 없는 전쟁이었다. 명분없는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했다.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월남전’으로도 불린 베트남전쟁. 제국주의에 대항한 ‘베트남의 민족해방 전쟁’이기도 했고, 미국이 ‘반공 십자군 성전’이란 허울 아래 저지른 추악한 전쟁(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이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꼭 40년이 됐지만 전쟁의 상흔은 가시지 않고 있다.

경향신문은 1975년 4월30일자 1면에 ‘월남 무조건 항복’ 기사를 실었다. 경향신문은 기사에서 “월남 정부는 30일 상오 10시30분 베트콩 측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30년에 걸친 월남의 유혈사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옹 반 민 월남 대통령은 이날 사이공 방송을 통해 전국에 방송된 단 1분간의 짤막한 연설에서 유혈을 방지하기 위해 베트콩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월남 정부의 ‘무조건 항복’은 미국의 패전을 의미했다.


1945년 열린 제네바 회담에서는 베트남의 분단을 결정하고, 2년 내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던 남베트남 정부는 총선거 실시를 거부했다. 미국은 1955년 응오딘지엠(고 딘 디엠)이 남베트남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본격적으로 그를 지원하며, 북베트남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1960년 12월 남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했고, ‘베트남 해방의 아버지’로 불린 호찌민은 베트콩을 적극 지원한다. 그러자 미국의 개입폭도 확대됐다. 1964년 대규모 파병을 시작한 미국은 게릴라전으로 맞선 베트콩에 네이팜탄, 고엽제 등을 쏟아부으며 베트남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베트남전쟁은 1970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계기로 ‘평화적 해결’ 쪽으로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1973년 평화협정이 체결됐으나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은 독재와 민중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했고, 1975년 1월 북베트남의 전면 공세와 미군의 철수 속에 급속하게 몰락해갔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베트남인 30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전쟁에 투입된 폭탄만 1400만여t에 달했다. 가해국인 미국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이 됐다. 가장 많은 전사자(5만8000여명)를 냈고, 사상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인 데다 ‘양민학살’을 저지른 데 대한 국제사회의 사죄 요구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청룡·맹호·백마 등 전투부대 소속 군인 32만명(연인원)을 파병했다. 특히 1972년에는 파병 한국군이 미군보다 많았다. 이는 한국이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베트남전쟁을 수행했다는 방증이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의 가해국인가, 동맹국의 요구에 응한 단순 참전국인가.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되도록 이런 물음에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게 한국 사회다.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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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