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의 글씨가 자연미를 방불케 하니 불세출의 사람이다. 중국의 선비들도 그의 글씨 한 장만 얻어도 가보로 삼았고…”(<태허정집>). 최항(1409~1474)의 극찬은 허언이 아니었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글씨는 ‘늠름한 기운이 날아 움직일 듯한 보물’(<용재총화)이라 했다. 북경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어디 가면 좋은 글씨를 찾느냐”고 물으면 중국인들은 딱 잘라 반문했다. “당신네 나라에 제일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합니까”(<연려실기술>).

안평대군에게 당대의 문·재사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이게 화근이 됐다. 계유정난(1453년)의 희생양이 되어 사약을 마셨다. 그토록 아꼈던 안견마저 사세가 위태롭게 돌아가자 스스로 도둑누명을 뒤집어쓴 뒤 안평대군의 품을 서둘러 떠났다(<백호전서>). 하지만 안평대군의 글씨는 천고의 보물로 전해졌다. 예컨대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안평대군의 책을 베껴 인쇄본으로 재출간하자 사대부들이 앞다퉈 달려왔다. 윤근수(1537~1616)는 “안평대군의 글씨 한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고 전했다(<월정집>).



안평대군은 ‘수집 덕후’였다. 중국 작가 35명의 작품 222점을 수집했다. “좋은 작품은 후한 값을 들여 구입했다”면서 자신의 수집병을 한껏 과시했다. 사대부들은 안평대군의 사후에 몰수된 작품 가운데 시중에 흘러나온 것을 구하느라 혈안이 됐다. 심지어 안평대군의 옛 집터에서 우연히 발굴된 벼루까지 ‘보물’ 대우를 받기도 했다. 윤근수는 벼루의 소유주(박동열)를 지칭하며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고 부러워하면서 “가보로 삼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남겼다. 이렇게 안평대군의 글씨와 소장품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대부의 자랑이자 로망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진적은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그림)’ 정도다. 그나마 국내에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진필은 ‘소원화개첩’이었다. A4 크기도 안되는 소품이지만 안평대군의 친필이기에 국보(238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이마저 2001년 도난당한 뒤 15년 이상 행방이 묘연하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다는데…. 이제는 ‘소원화개첩’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군의 꿈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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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