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위기와 기회가 교차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위기가 왔을 때는 그 위기로 인해 정신을 바짝 차린다. 그리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위기를 잘 이용하면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지 못할 때 위기는 장기화하거나 반복되곤 한다. 1960년대 말 이후 1970년대 말과 1990년대 말 재현된 경제위기,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를 시작으로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고 있는 대형 사건·사고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사한 성격의 위기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근본적 치유가 어렵다면,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도 찾아야 했지만 항상 위기를 미봉하곤 했다.

이와는 반대로 기회가 위기를 불러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4·19 혁명 이후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가 민주당의 분당과 5·16 쿠데타라는 위기로 귀결되었고, 10·26 이후의 기회가 5·17 계엄 확대를 통해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왔다. 경제적으로도 1970년대 말 중동의 건설특수 기회가 1980년대 초 외채위기로 귀결됐고, 1980년대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3저 호황과 북방정책으로 온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1997년 외환위기로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위기의 장기화를 초래한 가장 대표적 사례는 1987년 대통령선거였다. 야당의 분열로 인해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했으며, 그로 인한 위기의 장기화는 한국 사회를 정치적으로 후퇴시키는 가장 결정적 계기였다.

우선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과거사 문제를 ‘제때’에 해결하지 못했다.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면, 과거 독재정부 아래에서 발생했던 과거사 문제를 먼저 해결했을 것이다. 과거의 갈등 해결을 위해 역사적 화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곧 모든 것을 덮어선 안된다. 그러나 대선 실패로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 과거사 청산 문제가 진행됨으로써 전 사회적 차원에서 해야 할 사안이 정치적 사안으로 축소·왜곡되었다. 이는 현재까지 과거사 청산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로 작동하고 있다.


1987년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 벽보. 야권이 분열돼 정권교체에 실패한 13대 대선은 한국 사회를 정치적으로 후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사이 독재시대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과거사를 미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독재와 인권탄압은 건국과 산업화로 미화되었고, 민주주의는 비효율성의 상징으로 폄하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선진화라는 또 다른 담론이 자리를 하면서 ‘성장’과 ‘시장’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시장 만능주의를 비판하거나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친북 또는 종북좌파로 규정되었다. 독재시대에 자행되었던 모든 범죄는 묻혀버린 반면, 민주주의와 인권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북한을 추종하는 범죄자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1987년 이후 약 30년 동안 장기적으로 진행되면서 세계사적 전환기에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이념과 방향이 전혀 제시되지 못한 채 정치·사회적 위기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비판받고 있지만, 한국 사회도 민주화 이전으로 후퇴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또 다른 기회가 왔다. 4·13 총선 결과가 보여주듯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우민(愚民)이 아니었다. 그리고 명백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보여주었다. 공정한 절차가 작동하고 그를 통해 정치·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의 결과는 야당에 중요한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과거 한국 정치사가 보여주듯 한갓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 기회가 대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기회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기회는 곧 위기가 될 것이다. 1987년이 그랬다.

여당에는 위기가 왔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민들은 정국 운영과 공천 과정에서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여당을 심판하고자 했다. 이 위기는 반대로 여당에 합리적이고 공정한 보수적 이념을 정립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순간 기회는 진정한 기회가 될 것이고, 위기 역시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는 또 한 번 장기간의 위기와 정체에 빠질 것이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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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