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개혁 중 하나는 대동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할 수 있는 개혁 중 가장 큰 개혁은 세금 개혁이다. 기득권 집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여러 번 힘든 고비가 있었지만,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 조정은 백성의 신뢰를 되찾았고, 결과적으로 왕조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대동법 성립에 긴 세월이 걸린 것은 사회의 변화 속도가 느린 전근대사회에서 진행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 재벌 개혁이나 비정규직 문제가 그렇듯이 대개 큰 사회 개혁은 성공을 장담할 수도 없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수십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다.

 

100년에 걸친 대동법 성립 과정에서 성공의 단서가 마련된 결정적인 한 순간을 지적한다면 1650년(효종 1년) 1월21일 무렵이라 할 수 있다. 이날 대동법 반대 진영의 영수이자 이조판서인 신독재 김집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논산으로 내려갔다. 그의 낙향은 조정에 팽팽한 긴장을 불러왔다. 약 일주일 전에 우의정인 잠곡 김육이 그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낙향한 뒤 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육은 71세였고, 김집은 그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 조정을 양분하던 두 노인은 대동법 실시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대동법 추진이 좌초될 듯한 순간이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1649년 즉위 후 효종은 재야는 물론 조정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김집을 불러들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재야 사림을 대표했다. 40대 초반의 범 같은 제자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스승 김집과 함께 조정에 나왔다. 송시열은 즉위 전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들은 조정의 정치세력 교체를 통해 당시 극도로 어려운 국정을 개혁하려 했다. 한편 김육을 대표로 하는 고위 관료 중 일부는 대동법을 통한 재정 개혁을 추진 중이었다. 한쪽은 정치세력을, 다른 쪽은 재정구조를 바꾸려 한 셈이다.

 

김집의 입장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전통사회 중국과 한국에서 재야 지식인들은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부국강병’ 정책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정책의 성공은 황제나 국왕의 힘만을 키워서 지방사회를 억압하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기 때문이다. ‘부국강병’ 정책의 핵심이 재정 개혁이었다. 오늘날 정부가 주장하는 ‘선 성장 후 분배’나 ‘낙수효과’가 선뜻 믿기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선 성장’의 열매가 ‘후 분배’나 ‘낙수효과’ 없이 기득권 세력에게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비합리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공정한 과세와 민생 안정을 내세우며 김육이 대동법 실시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재야 사림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김집은 그런 사림의 영수였다.

 

김집의 낙향 소식에 김육은 효종에게 상소를 올려 위기감을 토로했다. “신은 이미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서 스스로를 보전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어진 김집과 갈등하며 개혁을 했다고 사람들이 신을 왕안석에 견주어 공격하면, 전하께서도 신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광조, 이이, 이원익, 김육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 모두 개혁을 추진하다 중국의 개혁가 왕안석에 비유되며 비난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왕안석에 비유되면,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종북’이나 ‘주사파’로 규정되는 것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어떤 정책이 왕안석의 정책에 비유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정책이 아닌 국가 이념의 문제가 되었다.

 

김집은 한양을 떠난 후 효종에게 글을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과 김육이 한평생 좋은 사이였고, 다시 만나면 전과 다름없이 잘 지내게 될 것이라 말했다. 다만 대동법 문제로 의견이 달랐지만, 김육이 무슨 딴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님을 믿는다고 했다. 이후 김집의 행적을 보면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김집은 대동법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대동법에 대한 김육의 안목과 진정성을 신뢰했다. 젊은 시절부터 김육이 보여주었던 판단과 행동이 그 근거였다. 김집이 김육의 대동법을 이렇게 규정한 순간이야말로 대동법의 성공이 예약된 순간이다. 이 사건 후에도 사림 측의 반대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집의 말은 재야 사림 전체가 존중하는 일종의 정치적 가이드라인 역할을 했다.

 

사실 당파적으로 이들은 모두 서인이었다. 하지만 우선해야 할 개혁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각자 관료와 지식인으로 살아온 환경과 일상에서 만나는 문제가 달랐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름에 대처하는 태도였다. 두 사람은 정국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넘지 않는 선이 있었다. 모두 인격적으로 수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들의 신뢰와 우정으로 국가적으로는 대동법이 성립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당파적으로는 서인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요즘 들어 부쩍 역사에서든 현실에서든 개인의 인격이 그의 정치적 입장만큼이나 중요하거나, 혹은 더 중요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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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