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조선시대에도 왕위 교체와 관련된 여러 번의 정치적 격변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신하들이 재위 중인 왕을 몰아내고 다른 왕을 세운 일이 적어도 두 번 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과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1623)이 그것이다.

 

똑같이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다르다. 광해군은 말 그대로 공로와 실책이 함께 있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그는 누구 못지않게 공로가 컸다. 또 전쟁 후 명나라와 청나라의 갈등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적 조치를 취했다. 국내 정치에서 상당한 실책을 범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그에게는 평가받을 만한 점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인조반정이 불가피했던가에 대해서는 당대는 물론 지금도 이견이 있다.

 

반면에 연산군은 도대체 좋게 봐줄 구석이 거의 없다. 우선 실록의 평가가 적나라하다. “어릴 적에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라고 말하는 이가 있으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해서는 궁 안에서의 행실이 자주 좋지 못했으나, 밖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났고 지극히 포학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죽였다.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연산군의 실정과 뒤따르는 반정은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릴 적에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은 쫓겨난 왕에 대한 일종의 흠집내기로 볼 수도 있다. 술과 여자에 빠지고, 잔인하고 난폭한 정치를 했다는 것 역시 그가 좋은 임금이 아닌 이유이기는 하지만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쫓겨나야 할 충분한 이유는 못 된다. 세조 역시 많은 사람을 죽였고, 심지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연산군이 사화를 두 차례나 일으켜서 신하들을 잔혹하게 죽였지만 그것도 반정을 충분히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중종대와 명종대에도 여러 차례 큰 사화가 있었다.

 

연산군의 어지럽고 잔혹한 정치를 그의 정신적·심리적 불안정과 결함에서 찾기도 한다. 그가 저지른 여러 위악적이고, 엽기적인 행위를 보면 그런 설명이 어느 정도는 맞는 듯도 하다. 성균관을 주색잡기의 마당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백성이 국문으로 투서를 한다는 이유로 한글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폐위된 생모를 복권시키는 데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가 나왔다.

 

연산군의 생모는 폐위된 후 사약을 받았다. 폐비윤씨가 그녀이다. 아버지 성종은 훌륭한 임금이었지만 자애로운 아버지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아버지 장례 과정에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소생임을 알게 되고, 곧바로 생모에 대한 복권작업을 시작한다. 구시대 정치문화에 익숙한 대신들은 거기에 찬성했고, 사헌부·사간원의 젊은 언관들은 적극 반대했다. 연산군은 3년 후 언관들의 격렬한 반대를 물리치며 윤씨 묘를 옮기고 신주와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5년 후에 폐비 윤씨를 완전히 복권시켜서 왕의 어머니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그 끝에 갑자사화가 발생했고 사화 후 2년 뒤에 반정을 맞는다.

 

연산군은 왜 쫓겨났고, 그렇듯 형편없이 그려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조선 사회가 그 전과 달라진 때문이리라. 조선은 40여년 전인 15세기 중반 증조할아버지 세조 때와 매우 다른 사회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연산군은 신하들을 통제하려면 상식 수준을 넘어서는 폭력적 방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적어도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세조와 성종대를 거치면서 조선 사회는 크게 바뀌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사회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교양, 새로운 상식, 무엇보다 새로운 도덕적 정당성의 기준을 확립했다.

 

반정은 한자로 ‘反政’이 아니라 ‘反正’이다. 정치적 행위였음에도, 도덕적 행위로 표시된 것이다. 중종대에 사림의 도덕적 가치가 크게 존중되는 방향으로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반대하는 이들 대부분도 대통령이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잘못이 탄핵과 파면을 당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은 정치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각자의 도덕적 감수성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런 차이는 한국 사회의 변화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한국 사회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종반정 이후 조선에서 다시는 연산군 같은 임금이 나오지 않았다. 그 변화가 단순히 정치권력 교체가 아닌 사회적 지형의 근본적 변화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도덕적 가치와 상식의 변화가 그 변화의 핵심이었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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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