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세자 이지가 70자(21m) 길이의 땅굴을 파고 탈출했다가 잡혔습니다.” 1623년 5월22일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의 아들 부부를 위리안치(가시덤불로 둘러싼 집에 가둔 유배형)한 강화 교동에서 급보가 올라왔다. 폐세자가 가위와 인두로 26일간이나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조선판 쇼생크 탈출이었다. 나무 위에 올라가 탈출 장면을 지켜보던 폐세자빈 박씨는 3일간 곡기를 끊은 뒤 목을 매어 죽었다.

 

 

조정은 벌집 쑤셔놓은 듯했다. 반정공신들은 “폐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앙앙불락했다. 인조와 이원익 등 일부 신료가 “골육 간 참변이 더는 없어야 한다”며 변호했지만 소용없었다. 폐세자는 ‘자진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잡은 금부도사가 도착하자 의연한 웃음을 지었다. 폐세자 부부의 나이는 둘 다 26살이었다. 폐세자가 남긴 시는 자못 가슴을 후벼 판다. “본래는 한 뿌린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가. … 어떻게 이 새장을 벗어나 녹수청산 마음대로 왕래하랴.” 광해군 부인(폐비 유씨)도 시름시름 앓다가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광해군은 꿋꿋하게 버텼다. 인심은 녹록지 않았다. 어느날 수행 궁비(계집종)가 하도 ‘싸가지’ 없게 굴자 보다 못한 광해군이 야단을 쳤다. 그러자 궁비가 광해군을 ‘영감’이라 하며 쏘아붙였다. “아니 ‘영감’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누구더러 호통을 치는 게요.” 폭군을 향한 ‘사이다 발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은 심상치 않은 당대의 여론을 전한다. “사람들은 이 궁비의 패악하고 교만한 발언에 분개했다. ‘저 궁비에게 하늘의 재앙이 내릴 거야’라는 말이 돌았다.” 1641년 광해군은 유배지 제주섬에서 6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사진은 경기 남양주 광해군 부부의 무덤) <인조실록>은 “광해군의 시를 들은 사람들은 비감에 젖었다”고 전했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기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의 조선은 어찌되었던가. 다 쓰러져 가던 명나라만 오로지 섬겼던 대가는 참담했다. 이른바 오랑캐(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결국 “나 때문에 조용했던 강토가 정묘·병자년의 큰 변란을 겪었다”고 인정했다.

 

새삼 ‘명나라를 향한 닥치고 충성’을 외친 조정 대신들을 향해 가슴을 쳤던 광해군의 발언(1621년)이 떠오른다. “분별력도 없으면서 큰소리만 치고 있구나. 필시 저 허풍 때문에 나라를 망칠 것이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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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