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에 민인생이라는 사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태종이 신하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오고 있었다. 뒤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민인생이 끼어있는 것을 태종이 보았다. 태종이 내시에게 눈짓으로 그가 왜 왔는지 알아보라는 신호를 보냈고, “신이 사관으로서 감히 직무를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태종실록> 1년 3월18일). 태종은 민인생을 알고 있었고, 그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태종실록>에 이 기사가 실린 것은 민인생도 태종이 자신을 불편해하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한 달여 뒤 민인생 관련 기사가 또 나온다. 태종이 편전에 있는데 민인생이 편전 뜰에 들어왔다. 태종이 그를 보고는 “사관이 어찌 들어왔는가?” 묻자, 민인생은 전에 허락하신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태종은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다. <태종실록>에 이야기가 이어진다.

 

민인생이 말하기를, “비록 편전이라 해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에서 강론하는 것을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필(史筆)은 마땅히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니, 민인생이 대답했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태종실록> 1년 4월29일)

 

태종은 좀 겸연쩍었던 것 같다.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고 웃으며 말한 후에 사필은 곧게 써야 한다고 맥락에 어긋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민인생의 답변은 태종을 더욱 무안케 했으리라.

 

민인생의 행위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짐작하려면 태종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는 26세에 아버지 이성계도 존경하는 정계의 거물 정몽주를 길거리에서 죽이고 500년 가까이 이어진 왕조를 무너뜨려 조선을 건국한 사람이다.

 

무서운 권력욕으로 동생마저 죽여가면서 아버지, 형, 그리고 자신과 아들까지 모두 4명의 왕을 만들었다.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세종비 심씨의 친정을 말 그대로 풍비박산냈다. 왕비의 친정집안인 외척의 발호를 차단하려는 태종의 의도에 따른 일이었다. 그런 태종을 상대로 민인생은 붓 한 자루에 의지해 임금이 불편해하는 일을 그 면전에서 대놓고 계속했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왕이 있는 곳, 정치적 행위가 있는 모든 곳에 사관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건국 초기에 그것은 아름다운 원칙일 뿐 현실은 아니었다. 왕 옆에 신하가 있는 것을 입시(入侍)라고 했다. 오가는 대화,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낱낱이 적고 있는 입시 사관의 존재에 무심한 왕이 어디 있었겠는가?

 

국왕들이 불편해해도 사관 입시 범위는 계속 확대됐다. 태조 때는 왕의 공부 자리인 경연에조차 사관이 못 들어갔다. 정종이 왕이 되면서 경연에 사관이 들어갔다. 세종 때도 처음에는 편전 밖 실외 동쪽 층계 위에 엎드려서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게 했다. 후에야 비로소 실내로 들였지만 언제나 들어오게 한 것은 아니다. 공식적인 의례가 있을 때, 다시 말해 영양가 있는 논의가 별로 없을 때 주로 입시가 허용되었다.

 

입시 범위가 크게 확대된 것은 성종 때이다. 이때는 주로 경연에서 국정이 논의되었는데, 그 모든 자리에 사관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사관이 못 들어간 자리는 관리에 대한 고과와 인사 문제를 논의했던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성종 때 그런 곳에도 사관 입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1515년(중종 10) 마침내 사관 2명의 입시가 허용되었다. 건국 100여년 만에 모든 정치적 논의가 있는 곳에 사관이 들어가게 된다.

 

사관이 말석에 앉아 있는 인사 논의 자리의 풍경은 어땠을까? 사관이 들어와서 기록하는 것은 그 공간에 공공성이 들어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건국 초기의 당위였을 뿐인 원칙을 현실로 바꿔낸 힘은 무엇이었나? 민인생 같은 사관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입시 범위의 확대는 조선왕조 사관들의 투쟁 결과물이다.

 

누구나 동의하다시피 현재의 한국 상황은 촛불집회의 결과이다. 따져보면 4·19 이래 한국 사회의 점진적 발전은 늘 평범한 국민의 힘으로 이룩됐다. 최순실이나 대통령의 집사들이 그렇게 오래 국정을 농단하는 동안 권력의 안팎에 있던 그 많은 제도권 내 엘리트들의 비판 기능은 중지되었다. 집단 내의 편견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과 건전한 상식 위에서 독립적 판단을 할 수 있어야 엘리트다. 그런 고도의 판단력이 없으면 적어도 정직한 직업의식이라도 있어야 한다.

 

민인생이 얼마나 뛰어난 사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정직한 사관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입시는 아마도 뛰어난 사관이 아닌 성실하고 정직한 사관들에 의해 확대되었을 것이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