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세종에게 ‘숨겨진 업적’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바로 실록 등 역사서를 보관하는 사고(史庫)의 확충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사고는 서울(춘추관)과 충주 등 2곳에만 있었다. 그러나 1439년(세종 21년) “실록과 고려사 등을 여러 곳에 나눠 보관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상소를 세종이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성주와 전주에도 사고를 마련해 각종 역사서를 보관했다. 이것은 세종대왕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신의 한 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성주와 충주, 춘추관 사고가 소실되었다. 전주사고마저 불탄다면 태조~명종 사이 조선 전기의 역사는 물론 고려사 전체가 공백으로 남을 판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전주의 실록을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 등은 “어진과 함께 실록도 피란시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태인 출신의 64세 노인 안의(1529~1596)와 56세 손홍록(1537~1610)이 노구를 이끌고 “내가 옮겨보겠다”면서 자원했다. 두 사람은 <조선왕조실록> 830책과 <고려사> 등 기타 전적 538책 등 50여바리를 내장산 용굴암-은적암-비래암으로 옮겨놓았다(1592년 6월22일). 두 사람의 지극정성은 시작에 불과했다. 실록 등을 행재소로 옮기라는 명을 받은 1593년 7월9일까지 370여일간 교대로 숙직하며 지켜냈다. 두 사람의 숙직일지(‘수직상체일기’·사진)를 보면 안의가 홀로 숙직한(獨直安) 일수가 174일, 손홍록이 혼자 보초를 선(獨直孫) 일수가 143일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숙직한 일수는 53일이었다. 선조는 두 사람에게 별제(6품)의 벼슬까지 내렸지만 “나라를 위한 일이었을 뿐”이라면서 고사했다. 각종 문헌에는 오희길·안의·손홍록 외에도 무사 김홍무와, 수복(守僕·지방관서의 잡일꾼) 한춘·박야금·김순복, 승려 희묵, 그리고 사당패(呈才人)100여명 등이 올라 있다.

 

결국 실록을 지켜낸 것은 지방의 무명선비를 중심으로 천대만 받던 일반 백성 및 천민들이었다.

 

만약 전주사고 실록이 소실되었다면 만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의 치세는 야사가 전하는 전설로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왜냐. <세종실록>이 사라졌을 테니까…. 세종의 숨겨진 업적이 ‘사고의 확충’이라면 그러한 세종의 업적을 지켜주고, 조선의 역사를 살려놓은 이들은 바로 세종대왕이 그토록 ‘불쌍히 여긴’ 백성들이다.

 

<이기환 논설위원>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