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년 8월 문무왕은 당나라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취리산(공주·사진)에서 회맹했다.” 이것이 <삼국사기>가 전하는 당나라의 주도 아래 신라-백제의 취리산 회맹 기사이다. 문무왕과 부여융은 제사를 지내고 제물(흰말)의 피를 마셨다. 양측은 “당나라의 번국(제후국)으로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조약문을 황금으로 새겨넣은 철판에 기록했다. 이 회맹에는 탐라와 왜의 사신들까지 증인으로 참석했다.

 


문무왕은 왜 백제 의자왕의 맏아들인 부여융과, 그것도 백제가 망한 지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맹약을 맺은 것일까. 복잡한 사정이 있다.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할 때 당태종은 “고구려·백제를 평정하면 백제땅은 모두 신라에 넘기겠다”고 밀약했다. 그러나 660년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자 당나라는 손바닥을 뒤집었다. 내친김에 신라까지 삼키려 했다. 이를 눈치챈 신라 조정에서 “당나라군과 결사항전하겠다”는 강경론이 비등하자 포기하고 말았다. 당나라 소정방은 귀국 후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임금과 신하, 백성들이 똘똘 뭉쳐 있어 정벌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에 당나라 관리가 직접 다스리는 웅진도독부를 두었다. 후방을 안정시켜 숙적 고구려를 정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곧 진퇴양난에 빠졌다. 고구려의 반격에 연전연패했다. 백제 부흥군의 기세도 하늘을 찔렀다. 단 10일 만에 3만명이 모인 부흥군은 당나라군을 고립무원에 빠뜨렸다. 견디다 못한 당고종은 유인궤에게 “신라에 의탁하든지, 그냥 귀국하든지 알아서 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백제땅을 차지해야 고구려 정벌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는 유인궤의 호소에 고종의 철군 불사 발언은 취소됐다. 결국 663년 8월 백강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이 백제·왜 연합군을 물리침으로써 백제 정벌은 마무리됐다. 당나라는 신라 문무왕을 계림도독에, 당나라에서 귀국시킨 백제의 부여융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취리산 회맹을 강요했다. 직접통치 대신 당황제의 관작을 받은 현지 수장이 다스리는 간접지배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취리산 회맹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굴욕회담’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백제부흥군의 가열한 독립투쟁이 없었다면 백제땅은 당나라 수중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문무왕도 취리산 회맹의 굴욕을 딛고 와신상담하여 당나라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했다. 취리산 회맹을 ‘흑역사’로만 기록할 수 없는 이유다.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