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방대한 기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백 권이 넘는 많은 기록들이 줄줄이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기록 생산량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기록 관리의 실태를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에 따르면, 고려의 문서 행정은 몹시 간략했다. 결재를 받으면 문서는 곧 파기하며, 아예 문서를 보관하는 창고조차 없었다. 보관하는 것은 국가의 역사와 외교 문서뿐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의 기록이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책 결정의 세부 과정은 문서로 남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모든 행정이 문서로 이루어졌다. 더구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에 힘입어 모든 문서는 중앙으로 집결되었다. 원칙대로라면 전국 각지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 많은 문서는 어디로 갔는가? 대부분 폐지가 되어 사라졌다.

조선시대의 폐지는 쓸모가 많았다. 사용한 종이도 세초(洗草)해서 재활용할 수 있다. 아예 지울 것도 없이 그대로 다시 떠서 재생지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기록물 외에도 포장지, 창호지, 벽지 등 다양한 용도가 있다. 옷과 신, 심지어 갑옷까지 만들 수 있다. 

이러니 폐지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전근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인구와 토지 관련 기록이다. 조선의 지방 관청은 3년마다 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작성하고, 20년마다 양안이라는 토지대장을 작성했다. 하나는 자체 보관하고 하나는 도(道)에 해당하는 감영에, 하나는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호조에 보냈다. 

 

하지만 상급 관청에서는 쌓아놓기만 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호조의 토지대장과 한성부의 호적을 찾아보아도 없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아전들이 훔쳐 쓰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설마 폐지로 쓰기만 했을까. 

 

문서를 조작해 농간을 부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안보와 외교 문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 도의 병사(兵使)는 무기 재고 현황을 기록하여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로 보낸다. 

 

그러나 병조에서 제대로 보관하지 않으니 폐지가 되고 만다. 재고를 점검하려 해도 근거삼을 문서가 없어 곤란을 겪었다. 외교문서의 경우 3년마다 활자로 인쇄하여 의정부와 예문관에 1건씩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유명무실했다.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의 초고, 사신단이 작성한 보고서 역시 폐지 더미에 섞여 들어갔다.

 

이렇게 각 관청에서 쏟아지는 폐지는 아전들의 쏠쏠한 부수입이었다. 아전들은 쓸모없는 문서뿐만 아니라 멀쩡한 문서와 책도 폐지로 내다 팔았다. 왕실 도서관인 홍문관에 소장된 책은 유난히 낙질이 많았다. 한두 권씩 빼다 폐지로 썼기 때문이다. 문서를 훼손하여 재활용하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규정이 <경국대전>에 실려 있으나 사문화된 지 오래였다. 차라리 폐지 판매를 양성화하여 필요 없는 문서를 팔고 수입은 국가에 귀속시키자는 제안도 나왔다.

 

아전만 탓할 일이 아니다. 신하들이 올린 상소는 승정원에서 받아서 <승정원일기>에 옮겨 적은 뒤 모두 폐지로 썼다. 옮겨 적었으면 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본을 파기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폐지를 새로 작성한 보고서로 착각하고 올린 적도 있다. 국왕에게 올라가는 모든 문서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이 이 지경이니, 다른 관청은 말할 것도 없다.

 

국왕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절약정신이 투철했던 영조는 보고서를 읽고 나면 “폐지로 쓰라”며 되돌려주곤 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보고서를 받아놓고 폐지 더미에 던져두었다가 찾지 못해 다시 올리라고 한 적도 있고, 영의정이 올린 보고서를 폐지로 썼다가 뒤늦게 알아챈 적도 있었다. 국왕의 명령서가 폐지에 파묻히는 사건도 벌어졌다.

 

‘기록문화의 꽃’이라는 의궤는 어떨까. 해외유출문화재 가운데 환수 1순위로 손꼽히는 것이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어람용 의궤이다. 하지만 조선 국왕들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정조는 즉위 직후 “어람용 의궤는 폐지가 되기 십상이니 아예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만들어 외규장각에 쌓아두었다가 병인양요 때 빼앗긴 것이다. 이것이 ‘기록의 나라’라는 조선의 기록 관리 실태이다.

 

지금도 국가 기관이 하는 일은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 번거롭지만 모든 절차를 보존한다는 점에서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문서는 찾아보면 없고, 민감한 사안은 누락되기 일쑤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록이 사라졌다며 소동이 벌어진다. 고의든 실수든 중요한 문서들이 폐지가 되어 트럭에 가득 실려간다. 공문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록의 나라’의 민낯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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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