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하면 한국 사회의 일본사 지식은 매우 부족하다. 중국사나 유럽사에 대해 웬만큼 아는 분들에게도 일본 역사는 생소하다. 그런데 얕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일본사에 대한 몇 가지 편견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일본은 원래 후진적이었는데, 근대에 서양문물을 어쩌다가 빨리 받아들인 덕에 앞서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에 뒤진 것, 그 결과 식민지가 되어 버린 쓰라린 역사에 대한 보상심리가 깔려 있다. 사실은 어떠한가. 16세기에서 17세기, 그러니까 전국시대가 전개되다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세우던 시기에 일본은 획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야마구치 게이지, 김현영 역 <일본근세의 쇄국과 개국>). 한반도를 통해 들어온 은 제련기술 회취법(灰吹法)을 받아들여 전국에서 경쟁적으로 은을 채굴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 생산된 은은 전 세계 생산량의 4분의 1~3분의 1을 차지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당시 국제무역은 주로 은으로 결제했음을 생각해보라. 일본은 갑자기 떼부자가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농업에도 눈부신 발전이 일어났다. 홍수 걱정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던 대하천의 중하류 지역을 개간하기 시작해서 경지면적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데다 농업기술, 비료 역시 크게 개선되었다. 농업생산이 증대된 것은 당연했다. 이런 변화는 인구로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초 1000만명 남짓이던 인구는 18세기 초 3000만명을 넘어섰다. 같은 시기 조선 인구는 반에 못 미친다(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조선보다 인구가 많았던 나라는 몇 나라 안 된다. 조선 인구도 적지 않은 숫자였다). 막부가 있던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인구는 100만명(서울은 30만명 정도. 유럽에 갖다 놓으면 물론 초대형 도시)이었다.

 

중요한 것은 도시 인구 비율이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역사 전개에서 좋다, 나쁘다의 가치평가는 차치하고 도시가 갖는 의미는 췌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시가 발달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느낌과 냄새가 사뭇 다르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에도 이외에도 오사카(38만명), 교토(34만명) 등 초대형 도시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인구 5만~6만 정도의 인구 밀집 도시들이 산재해 있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들은 입을 모아 풍족한 물자와 많은 인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경제사정이 이러하니 문화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던 도시인구를 기반으로 세련된 도시문화가 성장했다. 수많은 교육기관 설립과 출판, 인쇄업 발전은 사무라이 나라를 점점 지적인 사회로 바꿔갔다.

 

물론 이런 경제상황, 특히 농업 생산성의 획기적 증가는 일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조선, 중국 등 동아시아 전체에서 비슷하게 벌어졌다(은 대량 채굴은 일본에서만 이뤄짐). 이곳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사대부, 양반 등 신흥세력이 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조선, 중국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경제사정이 악화된 데 비해 일본은 급속한 성장은 멈췄지만 안정세는 유지해 나갔다. 농민도 상인도 전보다 가난해지지 않았다. 이처럼 안정된 자급자족 체제에 서양이 들이닥친 것이다.

 

일본을 치켜세웠으니, 흉도 하나 보자. 이건 일본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인데, 일본은 중국에 조공하지 않고 당당한 ‘독립국’으로 버텨 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중국 연호를 쓰지 않고 일본의 독자적 연호를 썼다고. 그러면서 동아시아 역사를 중국과 일본의 라이벌 구도로 보고 싶어 한다. 5세기에 조공했다는 왜 5왕의 얘기는 너무 먼 얘기이니 접어두고, 일본의 중앙정권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조공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예외는 15세기 초부터 100여년간 무로마치 막부 쇼군(將軍)이 명 황제에게 일본국왕으로 책봉받고 조공무역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봐서 일본은 중국에 조공한 기간이 다른 주변국에 비해 매우 짧다. 그러나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지정학적 의미는 180도 달랐기 때문에(본 칼럼 ‘지정학적 지옥 한국, 지질학적 지옥 일본’ 참조) 중국은 일본에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조공에 조금만 삐딱하게 보여도 정치적, 군사적 압살을 반복했던 한반도와는 천양지차다. 거센 압력에도 조공 거부를 쟁취했다면 모를까, 거저 생긴 현상이니 으스댈 거리는 아니다. 심지어 일본이 조공을 요청했으나 중국이 거절한 적도 있었다.

 

천황 칭호와 독자 연호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완벽히 일본 국내용이었다.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천황 칭호와 독자 연호는 용인되지 않았다. 일본 스스로도 조선이나 중국과 외교를 할 때 그 용어들을 외교문서에 쓰지 못했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소꿉장난처럼 꿋꿋하게 사용해온 것은 가상하나, 대단하게 떠벌릴 일은 아니다. 원래 달력은 당대 중심지역의 것을 쓰는 것이다. 당시 중국 연호를 쓰는 것은 현재 우리가 서기(西紀) 달력을 보며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체 ○○년’처럼 독자 달력에 헛심 쓰는 사람치고 변변한 사람 못 봤다.

 

쓰다 보니 할 말이 많아진다. 괜찮으시다면 다음 회에 ‘일본사 감상법’을 한 번 더 썼으면 한다.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역사와 현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봉건제와 ‘수저론’  (0) 2018.04.19
일본사 감상법 ①  (0) 2018.04.12
문화의 위기  (0) 2018.04.05
조선시대 펜스룰  (0) 2018.03.29
공부와 질문  (0) 2018.03.22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0) 2018.03.15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