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계는 제게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 시계가 낡았으니 제 것과 바꾸시죠.” 1932년 4월29일 아침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虹口) 거사를 위해 6원을 주고 구입한 ‘신상 시계’를 백범 김구의 낡은 시계와 바꾸었다. “저에겐 그저 1~2시간밖에 소용없는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자동차에 오르던 윤 의사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6~7원을 꺼내더니 백범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제 돈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백범은 출발하는 자동차를 향해 팔을 내저었다. “윤 동지! 지하에서 봅시다.”

 

 

오전 11시50분쯤 3만명의 상하이(上海) 주재 일본군 및 거류민이 참석한 훙커우 공원의 천장절(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장에서 폭발음이 퍼졌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물통 폭탄이 터져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이다. 내장이 쏟아진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는 곧 사망했다.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 훗날 외무대신이 된 시게미쓰는 의족에 의지한 채 1945년 9월2일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한쪽 눈알이 빠졌다. 관심의 초점은 그해 1월 상하이를 침공한 일본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었다.

 

온몸에 30여곳의 파편이 박혔을 뿐 4주 후면 완쾌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시라카와가 병상에서 술(브랜디)을 마시며 희희낙락하고 있다”는 근황마저 전해졌다. 그러나 5월21일부터 혈변증세를 보이더니 혼수상태에 빠졌다. 일왕 히로히토(裕仁)는 시라카와의 쾌유를 빌며 서둘러 작위(남작)와 욱일훈장까지 내렸다. 위독한 시라카와의 입술에 일왕이 사주(賜酒·임금이 하사하는 술)로 내린 백포도주를 입에 적시는 등 별의별 이벤트를 벌였지만 의거 27일 만인 5월26일 사망하고 만다. 현지신문인 ‘상해보’는 시라카와의 사망설이 전해지기 시작한 25일부터 “상하이 시민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고 전했다. 윤봉길 의사는 젖먹이 두 아들에게 유서(사진)를 남겼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아.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돌이켜보면 참 못난 나라였다. 24살 앞날이 창창한 젊은 가장을 저렇게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뿐인가. 윤 의사는 젖먹이 두 아들에게도 ‘용감한 투사가 되라’고 독려했다. 다시는 그런 못난 나라를 되물림해서는 안될 것이다. 스치듯 흘려보낸 며칠 전 4월29일의 역사를 다시 소환해보는 이유다.

 

<이기환 논설위원>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