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9월 복신 등 백제인들이 이미 망한 나라를 일으켰다.”(<일본서기>)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것은 660년 7월이었다. 그러나 원로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 30살 장수 흑치상지 등이 주류성을 거점으로 부흥군을 일으켰다. 10여일 만에 3만명이 모였고, 지방 200여성이 호응했다.

 

 

661년 9월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했다. 백제부흥군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전쟁에 주력하고, 신라는 당나라군을 위한 보급전쟁에 뛰어든 시기여서 백제땅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662년 7월 당나라가 장악한 백제땅은 고작 웅진성(공주) 정도였다. 당 고종은 웅진도독 유인궤에게 “정 여의치 않으면 본국으로 철수해도 좋다”는 명까지 내렸다. 하지만 백제부흥군 내부에서 틈이 생겼다. 복신이 라이벌 도침을 죽이고 권세를 독차지했다. 복신은 병을 구실로 문병하는 풍왕까지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낌새를 알아차린 풍왕이 복신을 급습해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당나라는 증원군 7000명을 보냈고, 신라는 김유신 등 30명의 장수와 5만 군대를 동원했다. 백제 풍왕의 요청을 받은 왜는 1만여명의 지원군을 보냈다. 663년 8월 백강구에서 백제-왜, 신라-당나라가 2 대 2의 치열한 동아시아 국제전을 벌였다. 그러나 4번의 전투 모두 나당연합군이 승리했다. “왜군이 당나라 화공에 쩔쩔맸고, 익사한 자가 부지기수”(<일본서기>)였으며, “왜선 400척이 불탔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자치통감>)고 한다. 백제 풍왕은 고구려로 망명했다. 백제 유민들은 손을 잡고 속절없이 함락되는 주류성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주류성을 잃었구나!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겼구나!”(<일본서기>)

 

이렇게 주류성은 부흥백제국의 도읍이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삼국사기> ‘지리조’도 ‘위치가 불분명한 지역(有名未詳地分條)’으로 분류했다. 얼마 전 문화재청이 부안 우금산성 발굴(사진)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돌리면서 ‘백제 부흥 운동의 최후거점’으로 표현했다. 학계 상당수가 주장하는 설이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국가기관이 앞장서서 특정 설을 보증해줄 필요는 없다. 일찍이 공자는 “의심나는 것은 공백으로 남겨둔다”(<논어>)고 했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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