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1519년)로 조광조 일파가 제거되었다. 개혁정치가 일단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세상이 끝날 리가 있을까. 16세기 후반이 되자 율곡 이이가 등장해 다시 국정의 혁신을 부르짖었다.

 

그는 젊은 국왕 선조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성학집요>를 편찬했다(1575년).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대학>을 능가하는 제왕학의 교재였다.

 

혹자는 이 책에 ‘평천하’라는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우리나라의 왕은 제후에 불과했기 때문에, 천하를 평정하는 큰 사업은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라는 설명을 붙이는 학자들도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이는 이미 성리철학의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고, 그래서 그는 ‘대학’의 근본이념을 중시하면서도 상당한 변주를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평천하’ 대신에 ‘도통’이란 항목을 새로 설정했다. 성리학을 영구불변의 진리로 확신하고, 과거 중국의 성현들이 주고받았던 그 도를 이 땅에서 조선의 왕이 완성하기를 소망했다.

 

<성학집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입지(立志)를 중시했다. 이이는 공부를 처음 시작한 청소년들을 위해 쓴 책, <격몽요결>에서도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따지고 보면, 송나라의 주자 역시 ‘성의정심’이란 용어를 통해 입지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조선에서도 조광조와 조원기 등이 그 전통을 이었던 것인데, 이이는 그 뜻을 더욱 명확히 밝혔다.

 

“배움에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뜻이 바로 서지 않고서도 공부를 이룬 경우는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몸을 닦는(修己)’ 조목에서는 ‘뜻을 세우는 일’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나는 이 항목을 가장 앞에 둔다.”

 

왕이 큰 뜻을 품었다 하자. 그럼 그는 어떤 방식으로 정치를 할 것인가. 흥미롭게도 이이는 군신공치(君臣共治)에 방점을 찍었다. “신하들의 훌륭한 조언이 정책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임금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신하들의 공론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이는 중국 고대의 순(舜)임금도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에 정치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이이는 황제의 권력이 막강한 역대 중국 사회와는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공치’를 강조한 점에서 이이의 생각은 삼봉 정도전과 세종대왕의 뜻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공치’는 유럽의 역사적 전통과도 확연히 구별된다. 가령 서양 중세에 기사들은 주군인 영주, 왕 또는 교회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일본에서도 사무라이들은 다이묘에게 절대복종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조선에선 ‘공치’의 이념이 하나의 뚜렷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이미 고질로 굳어진 당대의 적폐를 해결하기 위해 이이는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여러 가지 실질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이이는 소박한 이상주의자 또는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정도전의 뒤를 이은 최고의 경세가였다. 국가는 백성들이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라. 이것이 그의 처방전이었다. 그러려면 세금도 적게, 부역도 가볍게 하라고 충고했다. 국가의 재정 지출은 줄이되, 백성들의 생산성은 극대화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국정개혁에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했다. 이이가 보기에, 16세기의 조선사회는 기강이 무너져 있었다. “정치는 기강을 세우는 것이 첫째로 중요합니다. 기강이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기강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무너집니다. 원기가 없으면 온몸에 맥이 풀립니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기강이 무너진다면) 만약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나라가 오래된 흙담이 무너지듯 다 허물어지고 말 것입니다. 다시는 구제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선조와 그의 측근들은 여러 이유를 들먹이며 개혁을 미루었다. 우유부단한 조정의 형세를 지켜보며, 이이의 심경은 날이 갈수록 착잡해졌다. 그는 안간힘을 내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성학집요>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성왕의 정치는 책에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치 규구(規矩·컴퍼스 및 자)가 수중에 있어서 각진 도형과 둥근 모양을 다 그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처음에는 손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차츰 익숙해질 것입니다. 어찌 왕도정치를 할 수 없다며 탄식하겠습니까?” 그러나 <성학집요>가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선조는 이이의 충언을 끝내 따르지 않았다. 결과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역사는 기억한다. 조선왕조는 왜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력으로는 명맥조차 잇지 못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사방을 떠돌았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이이와 같은 사상의 스승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환부를 도려낼 단호한 집도의도 꼭 필요할 것이다. 기득권층의 거센 저항을 비롯해 갖은 난관을 뚫고 나갈 강력한 리더십도 있어야 한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정권교체는 멋지게 이뤘다지만, 이 나라는 제 길을 잘 헤쳐나가고 있는 것일까.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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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