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학생들을 인솔해 이탈리아 도시들을 답사한 적이 있다. 계절학기 프로그램으로 강좌 제목은 ‘르네상스와 근대의 탄생’이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도시는 아니었지만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파도바에 잠깐 들렀는데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있는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벽화는 르네상스 시작을 알리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벽화의 여러 장면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천사들의 우는 모습이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위에서 천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격한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일명 ‘피에타’라고 불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은 인간의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뜻을 상징하는 예정된 역사이기에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로서의 인간적인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격한 슬픔을 분출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의 분출이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요소로 간주된다.

 

시선을 끄는 또 다른 장면은 지옥에서 목 매달려 있는 유다의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돈 몇 푼에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는 탐욕스러운 상인이자 이자 대부업자로 그려져 있다. 조토가 유다를 이자 대부업자로 그린 것은 아마 그림 주문자의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조토에게 그림을 의뢰했던 사람은 파도바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 출신의 엔리코 스크로베니였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 악명 높았던 이자 대부업자(일반적으로는 고리대금업자로 불리는)였다.

 

우리가 유럽 역사에서 알고 있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용어와 그들의 역사에 관해 오해와 편견이 많다. 첫 번째 오해는 고리대금업자 하면 유대인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 상인보다 기독교 상인, 특히 이탈리아 상인이 대부업을 주도했다. 둘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리대금업자의 정확한 의미는 이자 대부업자였다는 것이다.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자가 높거나 낮음에 상관없이 원금 이외에 한 푼이라도 더 받으면 그것은 유저리(usury)였다. 이자는 큰 종교적 죄악이었고, 이자 대부업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 교회 묘지에 묻히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기독교에서 이자가 죄악인 근거는 성경 여기저기에 있다.

 

엔리코의 아버지 리날도 스크로베니도 이자 대부업자였다. 그런 이유로 사후세계 여행기인 <신곡>의 저자 단테는 리날도를 지옥에 처박아 놓았다. 엔리코가 조토를 불러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자 대부업자 유다를 그리게 한 것은 아버지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간절한 열망의 발로였다. 이러한 열망은 그림의 다른 한 장면에 잘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엔리코가 무릎을 꿇고 예배당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고 있고 마리아는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장면이다.

 

엔리코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탈리아 상인들 대다수는 이자 대부의 죄를 씻기 위해 임종 직전 유언장을 통해 부당하게 수취한 이자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흘러 원주인을 찾을 수가 없을 때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거나 교회에 기부하라고 가르쳤다. 돌려주는 행위는 천국으로 가는 여권이나 다름없었다. 엔리코도 마지막 순간에 이자를 돌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면서 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은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빌려준 돈을 약속한 시간에 돌려받지 못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돈을 빌려주게 되면 유리한 투자를 해서 합법적인 이득을 얻을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채무자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원금 상실 위험이 있기에 어느 정도 이자는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갔다. 물론 근대에 들어서도 교회나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여전히 이자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치명적인 죄악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로마 교황청은 이자를 금지하는 2000년이나 된 교리를 폐기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자는 더 이상 불법적인 경제행위도 아니고 사회적·윤리적 죄악도 아니다. 이자를 용인하는 경제적 심성은 자본주의 출현에 필수적이고, 합법적인 이자 대부업체인 은행은 자본주의를 견인한 핵심 동력 기관이다. 자본의 대부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인 이자는 자본의 몸집을 더욱더 거대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자본은 더 많은 힘과 권력을 차지하면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무한한 식욕을 억제할 제어장치가 사라진 지 오래인 것 같다. <21세기 자본>을 저술한 토마 피케티와 같은 학자들은 자본 소득과 노동 소득의 분배율이 갈수록 상대적으로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고 있다. 자본의 몫은 커지고 상대적으로 노동의 몫은 줄어들면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의 욕망을 순화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자본의 몫을 줄이고 노동의 몫을 높임으로써 좀 더 고상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의 끝없는 욕구에 종속된 우리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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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