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무심했던 시간의 흐름을 다시 느끼게 된다. 올해도 사회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순조로운 것들보다 실망스러운 것들이 많았지만, 아마도 그것들을 ‘개혁’의 현실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새 정부가 시작되어 초반에 가졌던 소망과 기세도 많이 수그러들었고, 대통령 지지율도 낮아졌다. 예상했던 일이다. 본래 개혁은 다양한 국면들을 지나기 마련이다. 그래도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여러 개혁들이 결국 어떻게 될까? 누구도 미리 알 수는 없다. 사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처럼 절대자인 신의 섭리를 헤아리지 않았던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에서 역사가 그렇게 자주 소환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조선은 500년 넘게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특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패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쪽이 더 자연스럽다. 중국이 그랬고,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크게 보면 일본도 그랬다. 더구나 학계 연구에 따르면 17세기에는 기후환경도 불안정했다. 한 세기 내내 평균기온이 더 낮았다. 농업이 기간산업이던 조선에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이상기온은 흉작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민생 악화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살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내부 개혁에 일정하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크게 세 번의 거대한 세금개혁을 추진했다. 세종 때 공법(1444, 세종26), 효종(재위, 1649~1659)에서 숙종(재위, 1674∼1720)에 이르는 기간에 도별로 차례로 성립된 대동법, 그리고 영조 때 균역법(1751, 영조27)이 그것이다. 엇비슷한 시간 간격을 두고 개혁을 성공시키며 조선은 백성의 신뢰를 되찾고 왕조의 수명을 이어갔다. 앞의 두 번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마지막 것은 미완에 그쳤다.

 

15세기 조선은 거의 전방위적으로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짜여진 국가체제가 큰 수정이 없이 왕조 말까지 유지되었다. 그만큼 정교했다. 오늘날 우리도 이 시기에 이룩된 성과의 덕을 본다. 한글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때 이른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5세기 조선의 성과는 사실상 고려 말 공민왕 때(재위, 1351~1374)부터 시작된 개혁 추진의 결실이다. 조선 건국 과정 자체가 그 개혁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비효율적이고 불평등한 세금 운영이 나라를 끝장낸다는 것을 잘 알았다. 바로 그들 자신이 그 이유로 고려왕조를 끝장낸 사람들이다. 세종이 집권 초반부터 집요하게 세금개혁을 추진했던 것이 그 개인의 성향이나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대동법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16세기 초반 무렵 등장했던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의 후예이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그 사람들이다. 대동법 성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김육도 그들의 직계 후손이다. 사림이 그토록 비판했던 사람들이 ‘훈구’이다. 그들은 국가권력을 사유화했고, 마침내 부패했다. 그들은 세조의 정치적 쿠데타에 동조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훈구’의 인물들 중 다수가 집현전 학사 출신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젊은 시절 세종의 신하로서 빛나는 세종시대의 주역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적으로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갔고, 그 덕에 공신이 되어 높은 관직을 오래 유지했고, 거대한 부를 이룩했고, 그것을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들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사림이다. 조선이 유지되었던 것은 계속해서 개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치적 대안세력인 사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 왕조에서 추진된 동일한 세금제도 개혁이었지만, 공법, 대동법, 균역법은 추진과정과 결과에서 각각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공법은 국왕 세종이 추진해서 성공시켰고, 대동법은 개혁 관료들이 추진해서 성공시켰고, 균역법은 국왕 영조가 추진했지만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다른 양상이 바로 해당 시기 조선의 모습 그 자체이다. 건국 초기에는 국왕 중심의 리더십이 성공적으로 작동했고, 왕조 중반에는 사림과 개혁 관료들이 그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고, 왕조 후반기에는 다시 국왕이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조선이 내부 혼란을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망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균역법이 공법과 대동법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시간이 지나며 더 이상 개혁적이지 않게 된 사림의 대안세력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70년이다. 건국 이후 한국은 많은 것을 성취했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듯이 그런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방식들이 전처럼 효율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이제 ‘낙수효과’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더구나 비효율만 문제가 아니다. 올해 유난히 참혹한 산업재해와 반인권적인 문제들이 언론에 많이 등장했다. 그것들이 올해만 있는 일들일 리 없다. 세밑에, 우리가 걸어왔고 걸어갈 길을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가.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