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원래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그렇지만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공감 가능한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공감은 인간의 본능이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다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비뚤어진 공감이 빚어낸 비극은 인류의 역사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공감은 때로 근시안적이고 불공평하며 비합리적이다. 그것은 공감의 본질적인 속성에 기인한다.

 

첫째, 공감은 주관적이다. 공감을 위해서는 감정의 교류, 즉 교감이 필요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교감은 ‘서로 접촉하여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다. 무슨 말인지 애매하다면 예문을 보자. 첫 번째 예문은 박목월의 수필이다.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고요히 반짝이는 별과의 그 그윽한 교감을 읊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예문은 박완서의 소설이다. “하얀 화강암 위령탑은 하늘을 떠도는 수많은 죽은 사람들과 교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영검스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교감은 저 하늘의 별과도 할 수 있고, 죽은 사람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적인 표현임을 감안하더라도, 시인 박목월과 소설가 박완서의 단어 선택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감정 없는 존재와도 교감은 가능하다. 심지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도 교감이 가능하다. 교감은 내 감정을 투영한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본디 주관적이다. 따라서 타인의 감정을 정확히 읽고 완벽히 공감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연인도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가슴을 열어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노랫말이 왜 나왔겠는가.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공감하지 못해 갈등이 벌어지곤 하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공감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말로는 공감한다지만, 그것은 막연한 상상에 가깝다.

 

둘째, 공감은 편파적이기 쉽다. 개는 공감을 잘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주인이 슬퍼하면 따라서 슬퍼하고, 주인이 기뻐하면 따라서 기뻐한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기뻐하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다면, 당신의 개는 슬퍼할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만약 당신이 그 사이코패스 살인마이고, 방금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와 희열에 차 있다면, 당신의 개는 기뻐할 것이다. 개의 공감은 이성적 판단이 결여된 무조건적 공감이기 때문이다.

 

고독한 현대인은 무조건적인 공감을 갈망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편을 들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어쩌면 현대인이 개를 기르는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무조건적인 공감을 요구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공감은 무조건적 공감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고차원적 공감이며,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판사와 같은 균형 잡힌 공감이다.

흔히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며 판사를 비난하곤 하지만, 한쪽의 감정에 일방적으로 동조하는 편파적인 공감이 과연 제대로 된 공감이라 할 수 있겠는가. 판사는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만큼 가해자에게도 공감해야 한다. 그것은 판사의 의무다. 판사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한편, 가해자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도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해자에 대한 공감이 필요 없다면 재판도 필요 없다. 인민재판이 답이다.

 

셋째, 공감은 때로 이성을 마비시킨다. <공감에 반대하다(Against Empathy)>라는 책으로 무분별한 공감의 위험성을 경고한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폴 블룸의 또 다른 저서 <선악의 진화 심리학>에서 인용한 실험 이야기다. 쥐 한 마리에게 전기충격을 주어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든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쥐들 앞에는 전기충격을 멈추는 지렛대가 있다. 어떤 쥐는 재빨리 지렛대를 눌러 고통받는 쥐를 구한다. 하지만 어떤 쥐는 꿈쩍 않고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방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감 능력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그 반대다. 전기충격을 받는 쥐의 고통에 절실히 공감한 나머지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이 실험은 공감이 결코 최선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공감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공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감정에 지배당한 나머지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한다면, 공포에 질려 꼼짝 않는 쥐와 다를 것이 없다. 대책 없는 공감에 머무르고 말 것인가, 아니면 이성적인 판단으로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것인가. 해답은 자명하다. 현대인에게 공감의 미덕이 아무리 절실하다고 하지만, 이성의 토대 위에 세워진 현대 문명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다.

 

공감을 강요하지 마라. 나는 판단의 주체성을 빼앗는 ‘닥치고 공감’을 거부한다. 섣불리 공감하지 않는 이유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라서가 아니라 이성적 판단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공감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우리는 공감의 필요성만큼이나 그 위험성과 부작용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장유승 |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