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민용 기자

ㆍ군함 앞세운 일본, 조선에 개방 강요

1800년대 세계는 제국주의의 음산한 기운에 휩싸였다. 강대국들은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압박해 개항을 요구하는가 하면 아예 총칼을 들이대고 침략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포함외교(砲艦外交)에 굴복해 나라의 문을 열었다. ‘포함외교’란 말 그대로 “강대국이 함대의 무력으로 상대국을 압박해 목적을 달성하는 강제적 외교 수단”을 말한다.

당시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은 순양함 4척을 이끌고 와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일본에 전달했다. 힘에 굴복한 일본은 이듬해 미·일화친조약을 맺은 데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신들도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한다. 그들이 노린 첫 ‘먹잇감’이 조선이다.

흥선대원군의 오랑캐를 배척하는 내용의 ‘양이정책’에 막혀 조선과의 수교를 맺지 못하던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이루기 위해 포함외교를 벌인다.

‘모방의 나라’답게 미국이 자신들에게 써먹은 방법을 조선 개항에 그대로 응용한 것.

그 첫 사건이 ‘운요호 사건’이다. ‘강화도 사건’으로도 불린다.

어느 날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雲楊號)를 부산에 보낸다. 조선 해안을 탐측하고 연구하기 위함이라는 게 겉으로 드러낸 그들의 구실이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운요호는 동해안을 순항하고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앞 난지도에 이른다.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는 작은 배로 갈아타고 일본군 몇 명과 함께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한다.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 수병이 느닷없이 나타난 일본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에게 조선 수병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함포를 앞세운 일본군 공격에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패퇴한다. 대포 35문과 화승총 130여정 등도 약탈당한다. 일본군은 2명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다. 이날이 1875년 9월20일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 측에 뒤집어씌우며 수교통상할 것을 강요한다. 힘이 없던 조선은 결국 이듬해 2월26일 ‘강화도조약’을 맺고 나라의 문을 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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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