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기자 

ㆍ미국·서유럽, 일제히 이라크 지원

중동의 맹주를 다투던 이란과 이라크는 1979년 각각 정치적 대격변을 겪는다. 2월에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친미 팔레비 왕조가 몰락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7월에는 이라크에서 향후 중동 정세의 폭풍의 눈이 되는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양국은 국경 근방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을 빈번하게 벌였다. 그러던 중 1980년 9월22일 이라크 전투기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폭격하면서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전이 시작됐다.


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양국 접경지역의 경제·군사적 요충지인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싼 국경분쟁이다. 이라크는 이 수로 전체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이란은 수로 중간에 국경선을 그어야 한다며 수십년 동안 대립해 왔다. 양국은 1975년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의 때 수로 중앙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국경협정을 맺었다. 당시 중동의 최고 강자였던 이란 팔레비 국왕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집권 후 당시 협정이 불평등 조약이라며 폐기를 선언하고, 이란에 대한 전면전을 시작했다.

중동지역의 복잡한 종교·정치적 요인도 전쟁의 핵심 요인이다. 이란은 전체 인구의 93%가 이슬람 시아파이고, 이라크는 인구의 50%가 시아파,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이 10%, 이슬람 수니파는 40%다. 이라크는 소수파인 수니파가 계속 집권하며 다수파인 시아파를 지배했다. 이슬람 혁명의 확산을 노린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라크 내 시아파에게 수니파가 정권을 잡고 있는 권력체제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후세인으로서는 호메이니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서도 전쟁이 필요했던 셈이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일제히 이라크를 지원했다. 이란에 세워진 반미·반서방 이슬람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초기부터 이라크에 막대한 무기를 판매했고, 미국은 이라크의 무차별적인 화학무기 사용과 민간인 학살을 묵인했다. 특히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83년 12월 도널드 럼즈펠드 특별교섭인을 이라크에 특사로 파견해 지원을 공식화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라크가 우위를 보였다.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 정규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데다 서방의 경제봉쇄로 군수지원도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 정신으로 무장한 이란의 혁명수비대와 민병대가 끈질기게 저항하며 전쟁은 장기화로 치닫았다.

전쟁은 결국 8년을 끌다 유엔의 중재로 1988년 8월22일 끝났다. 양국에서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와 5000억달러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다. 1990년 양국은 1975년 협정대로 국경선을 정하기로 하면서 국교를 회복했지만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싼 충돌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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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