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59)이 4·13 총선 길목에 새누리당 김문수 전 경기지사(64)에게 띄운 공개편지의 한 구절이다. 경북고·서울대 선후배로, 학생운동(김부겸)과 노동운동(김문수)에 투신해 40년 가까이 얼굴 트고 살다 대구 수성갑에서 맞닥뜨린 ‘얄궂은 운명’을 빗댄 것이다. 학창 시절 교회모임에서 만난 두 사람은 1980년대 서울대 앞에 사회과학서점을 열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신림4거리에서 ‘백두서점’을, 김 전 지사는 봉천4거리에서 ‘대학서점’을 운영했다. 대중정당 문턱을 차례로 넘고 잠룡으로 마주 선 외나무다리. 김 전 의원은 중선거구제로 치른 12대 총선(유성환·신도환) 후 31년 만에 대구에 도전하는 야당 정치인의 짐과 승부를 “가혹한 일”이라며 가벼이 보지 않았다.





자청한 일이다. 2011년 김 전 의원은 3차례(16·17·18대) 금배지를 단 경기 군포를 떠나 대구로 향했다. 그는 “지역주의·기득권·과거, 세 개의 벽을 넘으려 한다”며 “월급쟁이 국회의원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익숙한 곳에서 다시 떠난 길은 2012년(19대 총선), 2014년(대구시장 선거) 쓰라림을 품었다. “30%도 아니고, 40% 넘는 지지를 받고 돌아서면 도망가는 거라 생각했다”는 그도 ‘삼세판’은 마지막 정치적 도전이 될 참이다.

의외였다. 그가 경향신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입시를 한 달 앞둔 1976년 12월13일의 특집기사(사진)였다. ‘서울대 사회계열 1년 김부겸’이 후배들에게 쓴 당부 글은 심리적 안정을 강조하고, 과목별 마무리 경험을 전하며, “재수생들은 끝까지 버티라”는 말로 끝났다. 그도 재수한 76학번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유신반대 시위를 하다 구속된 그는 1980년 신군부에 맞선 ‘서울의 봄’ 시위를 이끌고 오래도록 ‘투사와 수배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민청학련 세대의 후배이고, 386보다는 앞선 ‘끼인 세대’다. 1988년 ‘양김 분열’에 분노해 시작했다는 정치에서도 내내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에 맞선 ‘비주류’로 살았다. DJ의 정계복귀 후 야권 분열에 맞선 ‘통추’에 몸담았고, 대북송금 특검을 반대하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독수리 5형제’(이부영·이우재·김부겸·김영춘·안영근)이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영향력과 지위를 키우다 계획된 지점에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 있고, 처음부터 자기 목소리를 뱉어내는 정치인이 있다”며 스스로를 ‘후자’라고 봤다.

‘경계인.’ 지난해 10월 나온 대담집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 - 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에서 팝칼럼니스트 김태훈씨는 김 전 의원을 “양쪽 언어를 모두 이해하는 노련한 통역가” “어느 한쪽의 손도 무조건 들어주지 않는 냉철한 중립자”라고 평했다. 어느 쪽에서도 적통과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당 내 야당’ ‘야당 내 여당’을 한 정치인을 ‘김부겸’으로 칭한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패가름과 격차, 갈등을 해소하는” 마중물이 되길 원했다. “내가 아니라 대구 시민들이 지역주의 벽을 깨는 날”이라고 매김한 그의 도전은 성공할까.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기수 사회에디터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