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세 글자는 이완용이 쓴 것입니다(사진).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동아일보 1924년 7월15일) 독립문 편액이 매국노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1896년 미국명 필립 제이슨(서재필)은 청나라 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 자리에 파리 독립문을 세우기 위해 발기인 모임 격인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이완용은 부위원장직을 맡아 100원을 기부했다. “일본과 청국의 싸움 끝에 조선이 독립국이 됐고, 영은문의 자리에 독립의 주춧돌을 세워 수치를 씻어야 한다”(독립신문 1896년 6월20일)고 설립취지를 밝혔다. 독립문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독립신문은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우리 대한의 독립에 공이 큰 인물’로 여겼으며, 이완용을 ‘손에 꼽을 만한 재상’으로 치켜세웠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펼쳤다. 막노동꾼, 소상인, 군인, 심지어는 소학교 학생과 기생들까지 성금대열에 속속 합류했다. 성금을 낸 백성의 명단을 일일이 게재했다. 그렇지만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백성이 십시일반 해봐야 얼마나 모았겠는가. 1897년 11월 겨우 준공했지만 독립협회가 지불하지 못한 공사비는 1300원(총공사비 3825원)에 달했다. 독립신문은 1898년 1~9월 사이에 무려 50여 차례나 모금 독촉 기사를 싣는다. 개중에는 “개탄스럽다. 외국인이 보기에도 수치스럽다”는 등의 자학적인 기사도 적지 않았다. 이후 독립문을 보는 시선은 이중적이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독립문의 의미는 ‘청나라’에서 ‘일제로부터의 독립’으로 전이됐다. 적어도 조선인들은 그랬다. 3·1운동 당시엔 독립문에 태극기를 꽂은 젊은이가 있었다. 하와이의 ‘신한민보’는 1913년 8월27일 독립문 삽화를 실어 경술국치를 기억하고자 했다.

 

그런데 일제의 반응은 이상했다. 철거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41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대대적인 독립문 수리공사를 펼쳤다. 1935년에는 독립문을 전승해야 할 문화재(고적)로 지정했다. 일제로서는 이완용의 글씨가 새겨진 독립문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일본과의 합방’을 기념하는 표상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독립문을 바라보는 심정은 매우 혼란스럽다. 120년 전 순수한 마음에서 1전 1전 기부한 백성들의 피와 땀까지 서려 있으니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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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