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전성기 경주엔 금입택(金入宅)이 35곳(실제 39곳) 있었다.”(<삼국유사> ‘기이·진한조’) 신라 왕경인 경주에 황금이 집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그야말로 금테 두른 호화저택이 40곳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실제 “(금입택인) 수망택에 황금이 홍수처럼 들어갔다”(<화랑세기>)고 한다. “신라 재상이 거느린 노동(奴)은 3000명이고, 갑옷 입은 병사와 가축의 숫자도 그만큼이었다”(<신당서> ‘열전·신라’)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 헌안왕은 860년 수망택과 이남택에게 ‘보림사에 황금 160분, 벼 2000곡을 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이 평소 존경했던 스님(체징)을 위해 돈 좀 내라’는 정식 요청이었다지만 과연 그럴까. 금입택 재력가들은 ‘강요된 기부’로 여기지 않았을까.

 

 

39 금입택 중의 으뜸은 김유신가의 ‘재매정택(사적 246호)’이다. 신라판 재벌이었다. 김유신의 증조부이자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김구해는 나라를 바친 공로로 본국(금관가야)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김유신은 삼국통일 후 김인문(문무왕의 동생)과 경주 시내의 노른자 땅을 반분했다. 밭 500결(230만평 추정)과 전국의 말 목장 6곳을 차례로 하사받았다. 성덕왕(재위 703~737)은 김유신의 부인인 지소를 위해 “‘부인’ 작호를 내리고 해마다 조 1000석을 하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성덕왕은 “과인이 지금 편안하게 술을 마시는 것은 태대각간(김유신) 덕분”이라면서 김유신의 손자인 윤중·윤문 형제를 총애했다. 집안의 우물인 ‘재매정(財買井·사진)’을 둘러싼 일화도 흥미롭다. 645년 백제군을 무찌르고 개선한 김유신은 또다시 백제의 반격소식을 듣는다.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다시 출정한다. 집을 그냥 지나치던 김유신은 50보쯤 가다가 말을 멈춰 “우리 집 물 좀 가져오라”고 했다. 김유신은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역시 우리 집 물이 최고”라고 감탄하면서 서둘러 전장으로 향했다. 멸사봉공의 정신을 상징하는 고사이다. 김유신 사후 재매정택을 지킨 지소 부인도 부창부수였다.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뒤 돌아온 아들 원술을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만약 재매정이 문자 그대로 ‘재물을 부르는 우물’로만 사용했다면 그저 돈만 좇은 신라판 재벌가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가치를 오롯이 지키는 진정한 명문가의 정신이 재매정에 녹아 있다. 최근 재매정택터에서 발견된 갑옷이 비록 김유신 장군의 것이 아니라도 반가운 이유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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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