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론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증세’이다.

새 정부가 연일 여러 국정과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들에 대개 큰돈이 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서 정부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국정과제 해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개 공감하지만, 증세는 환영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도 내년 선거를 앞두고 과감하게 밀어붙이기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라면 적어도 두 가지가 가능해야 한다. 이 말은 그 두 가지를 제대로 못 하면 국가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국법을 어긴 사람을 처벌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세금을 거둘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야말로 국가의 본질적 기능이다. 정약용이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흠흠심서>와 <경세유표>를 지어 형정(刑政)과 세정(稅政)에 대해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일까? 개인적으로 세정이 더 근본적이라 생각한다. 벌주어야 할 사람을 벌주지 못했다고 나라가 망했던 경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세금 운영이 공정하지 않아 나라가 망한 경우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14세기 말에 건국해서 20세기까지 지속된 왕조는 세계적으로도 조선이 거의 유일하다.

 

이런 장기 지속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들라면 세 번의 세금개혁을 들고 싶다. 15세기 전반의 공법, 17세기 후반의 대동법, 18세기 중반의 균역법이 그것이다. 대개 고등학교 때 들어보았을 법한 단어들이지만, 그 정확한 내용과 추진과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이들 개혁, 특히 앞쪽 두 개혁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재정개혁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세금 운영이 불공정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들 자신이 그 이유 때문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세종의 공법은 건국의 이유이자, 새 나라의 토대였다. 새 나라를 건국한 그 힘이 공법을 만든 힘이었다.

 

세금 수취의 황금률은 ‘공정’이다. 농업국가 조선의 공정함이란 소출량이 많은 땅에는 많이, 적은 땅에는 적게 거두거나 거두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소출에 영향을 주는 매해의 풍흉과 토지비옥도를 모두 재서 나라 전체의 경작지에 등급을 매겼다.

 

가진 것이라고는 붓, 종이, 자(尺)밖에 없던 시절이다. 드높은 정치적 이상과 집요한 행정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17세기 중반 조선은 세종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200년은 중국으로 치면 성공한 왕조 하나가 세워졌다 사라지는 정도의 시간이다. 세종 때 공법은 땅 가진 사람들에게 과세했다. 공법 성립 후 경작지에 대한 수세율은 장기적으로 계속해서 낮아졌다. 지주들의 조세 저항의 결과였다. 그 풍선효과로 공물 부문 세금이 크게 늘었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 공법이 성립된 세종 때는 아직 건국의 기상이 남아있었다. 이제 건국 과정의 험난했던 이야기를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들은 왕도 없고, 나라 곳곳에 강력한 기득권층이 형성되었다. 개혁의 동력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지식인과 관료들에게서 나와야 했다. 대동법은 그들이 추진한 개혁이다.

 

대동법은 중앙정부가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실시한 비상한 조세혁명이다. 대동법 이전에 백성들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이 공물이었다. 조선정부의 과제는 두 가지였는데, 건전한 재정구조를 확립하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공물 부담은 줄여줘야 했다. 두 과제는 서로 상충했다. 그 사이에서 대동법이 공략한 것은 세금 누출 구조를 수선한 것이다. 대동법의 결과로 백성들은 지역에 따라서는 기존에 내던 것의 20% 정도만 내고도 국가재정은 건전성을 회복했다. 문제는 세금 누출 구조를 만들어낸 이들이 국가 최고 권력자들과 그 주변 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구조적 부패는 대개 정치권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법이다. 조선은 바로 그 지점을 과감하게 도려냈다. 왕과 왕비의 집안, 정승과 판서의 친·인척들이 바로 척결 대상이었다. 대동법은 조세개혁이자 동시에 부패척결법이기도 했다. 대동법으로 조선정부는 백성들의 신뢰를 되찾았다.

 

대동법이 성립된 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다. 그 마지막 단계에서 정치적으로 개혁을 관철시킨 사람이 잠곡 김육이다. 그는 죽음을 10일도 안 남겨 놓고 왕에게 보내는 마지막 상소에서까지 대동법 실시를 간곡히 요청했다. 그가 죽자 이미 대동법이 실시되고 있던 충청도 백성들이 서울까지 문상을 왔다. 상주는 아버지 뜻에 따라 부조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그 부조로 김육을 기념하여 평택에 비를 세웠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로 알려진 비이다. 그 정식 명칭은 ‘조선국 영의정 김공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이다. 김육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말이다. 영원히는 아니어도 조선은 대동법 성립 후 다시 200년 넘게 지속되었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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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