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위상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80년대부터였을 것이다. 산업화로 인해 사회구조가 크게 변하자 아버지의 위기가 왔다. 고된 직장생활을 감당하느라 자기 집안의 하숙생으로 전락하다시피 한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차츰 소외되었다. 1997년의 금융위기 때는 대량해고와 조기퇴직의 바람이 불었다. 경제력마저 상실한 아버지의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사회 변동이 심해지면 아버지와 아들 세대는 대립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 물론 한때의 아들도 아버지가 되고, 그들 역시 아버지를 거부하는 아들과 부딪친다.

 

수십 년째 이 땅에서는 극심한 사회 변동이 이어진다. 사회 문제는 결국 가정 위기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 끝에, 나는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란 이름을 떠올린다.

 

그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묘사하는 데 누구보다 탁월하였다. 19세기 러시아의 사회 문제를 투르게네프는 소설로 형상화하였다. 정치, 사회 현실이 어떻게 가족 문제로, 세대 갈등으로 전이되는지를 소상히 밝힌 것이었다. 소설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점에서 걸작이었다.

 

이 소설에 대해 러시아 보수파들은 주인공 바자로프(아들)가 너무 미화됐다고 비판했다. 진보 측도 불만이었다. 그들은 투르게네프가 바자로프를 통해 러시아의 혁명세력을 희화화했다며 불쾌감을 쏟아냈다. 당대 진보도 보수도 작가를 공격해댔으니, 작가의 입지는 좁고 위태했다. 난세에 진실을 말하는 이는 억울하고 난처한 입장에 몰리기 쉽다.

1859년경 러시아는 불합리한 농노제도와 전제정치가 극에 달했다. 여러 정파의 이익이 충돌했다. 이것이 세대 간 갈등으로, 계층 간 대립으로 전이되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사회적 모순은 그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문제가 부자간의 대립 또는 부부 갈등의 형태로 분출되는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작중의 아버지들을 관념과 이상에 사로잡힌 세대로 그렸다. 구 귀족의 모습으로 이해한 것이다. 반면에 아들은 급진적 혁명 세대의 상징이었다. 매력적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바자로프, 그는 낡은 도덕과 관습을 여지없이 매도한 1860년대 러시아의 신문화의 기수였다. 젊은 그는 국가권력을 부정하고 과학적 물질주의를 추구했다. 바자로프가 대표하는 그 시대의 아들들은 구시대의 유산을 철저히 부정했다. 이른바 ‘니힐리스트’로서 그들은 구세대의 권력인 아버지들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제정러시아 말기에 전개된 신구 세대의 갈등에 내가 주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는 아버지의 위기, 즉 가정의 비극과 투르게네프의 시대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어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이미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개명한 근대에 무사히 안착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통의 청산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미래의 목적지가 명확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제정러시아 니힐리스트들의 경우처럼 우리의 미래 좌표도 몽롱하다. 우리는 지금 혼돈 속에 있다.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개인은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는 그렇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30년대의 독일, 히틀러의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그곳에서도 그 꿈이 존재하였다.

 

에리히 오저의 만화집 <아버지와 아들>을 읽어본 이는 알 것이다. 작가는 어떠한 비극 속에서도 인간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생활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대머리에 콧수염만 무성한 중년의 아버지와 열 살 남짓한 개구쟁이 소년이다. 지극히 평범한 그들 가족은 완벽한 행복의 공동체로 묘사되었다.

 

에피소드 하나. 작중의 아들은 방학을 애타게 기다린다. 드디어 방학 날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머리를 짜낸다. 아들이 단잠에 빠지자, 아버지는 침대까지 통째로 들어다 한적한 시골 숲에 내려놓는다. 이윽고 아침이 되자 단잠에서 깨어난 아들은 깜짝 놀라며 좋아한다. 나무 그늘에 숨어 이 광경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여러 해 전 독일에 살 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이 만화집을 가끔 읽었다. 우리는 모두 낄낄거렸고, 때로 눈가에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머리라서 더욱 가난하고 늙어 보이는 작중의 아버지, 그의 푸근한 마음이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들은 오저의 만화처럼 살 수 없다. 복잡하게 헝클어진 세상사를 평범한 우리가 마음 하나로 해결할 수는 없다. 알고 보면 작가 오저도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했었다.

 

세상의 진실은 어디 있을까. 따지고 보면 그리 큰 액수도 아닌 국민연금이다. 그 미래를 둘러싸고 세대 간 갈등이 증폭될 조짐이 있다. 어찌 이것이 한갓 세대의 문제일까. 이 사회의 본질, 그 구조적 문제를 직시할 일이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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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