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너머 평양이 또 있었다. 연암 박지원이 연행길에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鳳凰城)을 지날 때였다. 연암은 그곳이 바로 옛 평양(平壤)이라고 고증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고서…, 만약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말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만약 요동에 또 평양이 있었다고 말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며 꾸짖을 것이다. 요동이 본래 조선의 고지(故地)이며, 숙신(肅愼)·예맥(穢貊)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 조선에 복속했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오랄(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강역(疆域)임을 모르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한사군(漢四郡)을 압록강 안쪽에 국한하여 억지로 여기저기 배치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가운데서 찾는다. 그러다 보니 혹은 압록강을, 혹은 청천강을,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연암은 개탄했다. “이는 조선의 옛 강역이 전쟁도 없이 저절로 줄어드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이 쓴 목민서 '칠사고' (출처 : 경향DB)


한사군의 반은 요동에, 반은 여진 땅에 있었다는 것이 연암의 고증이었다. “현토 3현에 고구려가 있었고, 낙랑 25현에 조선이 있었다. 진번·임둔은 한나라 말기에 부여·읍루·옥저에 편입되었다. 부여는 다섯이 되고 옥저는 넷이 되어, 혹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말갈(靺鞨)로 발해(渤海)로 여진(女眞)으로 변했다.”

기씨(箕氏)·위씨(衛氏)·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하나의 평양이라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었다. <당서(唐書)>, <금사(金史)> 등에 의하면 영평(永平·하북성 노룡현)과 광녕(廣寧·요령성 북진현)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이었고, <요사(遼史)>에 의하면 요양현(遼陽懸)도 하나의 평양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씨(箕氏)가 처음에 영평·광녕의 사이에 살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겨 땅 이천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갔다. 머무는 곳은 모두 평양이라 칭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위의 평양도 바로 그 하나일 것이다. 패수도 이와 유사하다. 고구려의 영역이 때로 늘기도 줄기도 했을 때,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겨졌다.”

옛날 이주한 사람들이 새 거주지에 종전 거주지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적잖다. 지금의 이름에만 얽매인 어설픈 실증주의로는 각주구검의 어리석음에 빠지기 쉽다. 반면 당대의 실정과 세월의 변화를 무시한 채 지금의 침략야욕만으로 만든 역사지도는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어 위험하다. 동북아에 때 아닌 근대 전쟁의 야만성이 우려된다.


김태희 | 다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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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