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나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마침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의 글에서 흥미로운 글귀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334쪽, 1940)

 

벤야민이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한 것은 역사서술이다. 역사가의 실천적 활동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벤야민은 우리에게 익숙한 실증주의 또는 근대역사학자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근대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는 일찍이 말하였다. “그것이 본래 어떠했는가를 서술하는 것이 역사연구의 본질이다.” 벤야민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그럼 어떠해야 한다는 것인가?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행위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역사가란 사실의 인과관계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존재가 아니라, ‘순간의 기억을 포착하는’ 것이란 의미다. 망각의 위기에 빠진 순간의 기억을 기록함으로써 길이 보존하는 것, 여기에 역사가의 임무가 있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근대역사학의 입장에서는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역사가가 기껏 촉각을 세워 기록하는 것이 “섬광처럼 스치는” 과거의 기억 한 줌이라니! ‘번쩍’ 하고 뇌리를 스쳐가는 기억, 이것은 아마도 지배자들이 보기에는 큰 의미가 없는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작은 사건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세상의 심층구조를 파악하는 데 본질적인 기억들이다. 벤야민이 말한 “섬광처럼 스쳐가는 기억”은 그것이다. 나는 그렇게 추측한다.

 

나의 추론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어휘가 인용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위험의 순간”, 즉 위기라고 하는 벤야민의 상황 설정이다. 현대사회를 위협하는 “위기”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배계급의 도구로 넘어갈 위험”(같은 책, 334쪽)이다. 과연 기득권층은 공생적 적대관계에 있는 이른바 진보세력까지도 도구화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아도 그런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기득권층은 ‘세월호 사건’이든 ‘사드’ 배치,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도구화 전략을 구사한다.

 

그들은 주류언론과 국회 및 사법부를 움직여 자신들의 입장을 강변하고, 자신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진보진영까지도 은근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굴복시킨다.

 

사회적 약자로 내몰린, 양심적이고 평범한 시민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벤야민이 가장 고심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실토한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의 견해에 공감한다. 오늘날 우리 시민들이 갈망하는 구원의 주체는, 구원의 실천자가 되지 못한다. 가령 시민들이 외세의 궁극적인 철수를 바란다 해도, 시민들이 지지하는 정권은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중층적인 이해관계가 국내외적으로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각적 “구원”은 불가능하다. 갈수록 우리의 고민은 깊어진다. 어떻게 하면, 깊은 바닷속에서 죄 없이 죽은 아이들이 다시 우리 곁으로 되돌아오고, 권력의 폭력 앞에 맥없이 쓰러진 백남기 농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지난한 과제 앞에 서 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에게 벤야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메시아는 적(敵)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 적그리스도란 누구일까? 여기서는 자세히 논의할 겨를이 없다.

 

그저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라고 해두자.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온갖 적폐의 저편에 숨어 있는 것, 악질적 범죄 집단이라고 이해하자.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추악한 다국적 자본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그런 세력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메시아라고 볼 수 있다.

 

그 메시아와 역사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하나의 매듭이 지어진다. 나는 다시 한번 벤야민의 생각을 빌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만약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우리 가운데 누구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렇다면 이 점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역사가일 것은 자명하다.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다.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이처럼 시대의 고뇌를 함께하는 역사가라야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334~335쪽). 벤야민이야말로 실은 역사가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었다. 부족하기만 한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역사가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려왔다.

 

여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이 계절, 개혁을 목 놓아 기다리는 많은 시민들 속에서 왠지 나는 내밀한 나의 바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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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