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익필(1534~1599)을 아시는가. 그는 시와 문장에 뛰어나서 당대의 8문장가로 손꼽혔다. 석학 성혼과 이이는 그와 마음을 허락한 사이였다. 그들의 우정을 증명하는 편지가 많이 남아 있다.

 

성혼의 <우계집>에서 서너 통만 꺼내어 보자. “숙헌(이이)이 형의 편지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봉함을 뜯고 두 번 세 번 되풀이 읽었습니다.” 경신년(1560) 10월에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다.

 

성혼은 그를 학술모임에 초대하기도 하였다. “숙헌이 요즘 임진나루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다소 넓기에, 네댓 날쯤 문회(文會)를 열어 <대학>과 <논어>를 강론할 생각입니다. 형이 왕림하여 질정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1577년 윤8월)

 

3인의 대학자는 서로 편지를 공유할 정도로 가까웠다. “형에게 보내는 숙헌의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편지를 미리 뜯어보아도 좋다는 숙헌의 허락이 있었지요.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읽어보았더니, 숙헌의 날카로운 칼날도 형에게 완전히 제압되었군요. 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답니다.”(1579년 11월)

 

송익필은 초야에 묻혀 지냈으나 그의 정치 감각은 예리했다. 이따금 그는 친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치적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때로 형이 숙헌에게 경계하고 꾸짖는 말씀을 주십시오. 그가 시류를 좇는 재상이 되지 않게 하시면 여간 다행이 아니겠습니다.”(1583년 4월)

 

이이가 이조판서에 임명되자, 송익필은 몇 사람을 천거하였다. 이이는 그 명단을 창가에 붙여 놓고 거듭 살펴보았다. 이에 제자 김장생이 깜짝 놀라, 그 쪽지를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이이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이것이 무슨 잘못인가? 인재를 논의하는 것은 옛 성현도 마다하지 않으셨소.”(<송자대전>, 제212권)

 

송익필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노비의 피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의 할머니는 명문인 안씨 집안의 종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들 곧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 기묘사화의 와중에 주인 집안을 반역죄로 고발하여 벼슬을 얻었다(1521년).

 

그 일이 있고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조정에서는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송사련이 역모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안씨들은 즉각 복권되었다. 그들은 복수심을 불태우며 송사를 벌여, 송익필 일가를 다시 노비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 재판에서도 송씨는 지고 말았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당시 집권세력이 송익필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송익필을 서인의 “모주(謀主)”라며 처벌을 서둘렀다. 요컨대 당쟁의 광기가 빚은 사건이었다.

 

훗날 송익필의 제자였던 서성과 정엽 등이 인조에게 올린 상소문에 그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동인의 선봉장 격인 이발과 백유양이 이이와 성혼 등 서인을 무차별 공격하다 못해 그들의 막역지우인 송익필까지 없애려 들었다. 김장생은 반정공신 이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속사정을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1586년, 이발은 어전에서 송익필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송익필이 제자들을 총동원해 조정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고발이었다. 또, 이발은 안씨들을 사주해 송사를 일으켰다고도 했다. 당시 재판관은 법에 따라 안씨들의 패소를 선고할 예정이었다. 이발은 재판관을 연달아 세 번씩이나 갈아치운 끝에, 마침내 송익필 일가의 패소로 사태를 종결지었다(<사계전서>, 제2권).

 

사태를 예의 주시한 조헌은 상소를 올려, 송익필의 처지를 변호하였다. 이 모든 사태는 당쟁의 광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산해는 송익필에게, ‘만일 그대가 이이가 죽은 다음에 그 집안과 관계를 끊었더라면 후환이 없었을 것’이라고 압박할 정도였다. 조헌은 이러한 사실도 낱낱이 예시하였다(<송자대전>, 제207권).

 

송익필의 친구 성혼은 자신에게 반대파의 화살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굳게 우정을 지켰다. 1589년 가을, 성혼은 전라도 순창의 농장에서 수확한 많은 곡식을 극진한 편지와 함께 송익필에게 보냈다. 충청도 연산의 김장생 일가도 송익필을 보호하였다.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는 궁지에 빠진 옛 친구를 집으로 불러들여 10여년 동안 생계를 돌보았다(<계곡선생집>, 제12권).

 

그 오랜 세월에 날마다 송익필을 몸소 봉양한 이는 제자 김장생이었다(<계곡선생집>, 제14권).

 

송익필이 별세한 뒤에도 제자들은 스승의 억울함을 말하였다. 그들은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송익필의 명예회복을 부르짖었다. 조선에는, ‘양인이 된 지 60년이 지난 경우, 다시 노비로 되돌릴 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 제자들은 이 조항을 인용하며 스승의 신분 회복을 주장하였다. 제자들은 우연과 광기의 역사에 희생되고 만 스승의 처지를 변호한 것인데, 사태의 반전은 쉽지 않았다. 송익필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조선왕조가 망하기 직전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도처에 억울한 송익필들이 있다. 부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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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