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병자·정묘년의 변란을 당했다. 백성들이 아무리 날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다.” 1641년 인조 임금이 대국민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당시 병자호란 항복문서에 따라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도망쳐나온 조선 백성들을 다시 돌려보내야 할 딱한 처지에 놓였다. 전국이 눈물바다에 빠졌다. 인조는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책임감을 통감한다”고 자책했다. 2년 뒤인 1643년 대사간 유백증은 심상치 않은 상소문을 올린다. “천재지변도, 흉년도, 인심의 이반도 광해군 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래도 광해군 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전하는 뭡니까. 세 번(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나 환란을 겪지 않았습니까.” 인조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한마디가 있었다. “이 지경이라면 애초에 반정은 왜 일으켰습니까.”

 

 

그랬다. 인조반정의 주요 타깃은 광해군의 ‘관형향배(觀形向背)’ 외교였다. 1623년 반정 직후 발표한 혁명공약은 선명성 그 자체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재조지은·再造之恩) 명나라에 배은망덕했고, 사태를 관망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외교(관형향배)로 오랑캐(후금)에 투항했다”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절묘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다.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자 신료들은 명나라에 ‘닥치고 충성’을 외쳤다. 광해군은 갖가지 핑계를 댔지만 어쩔 수 없이 파병군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절묘한 수를 썼다. 총사령관 강홍립에게 밀명을 내렸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사태의 추이를 보고 행동하라’(관형향배)는 것이었다. 강홍립은 무려 7개월간이나 행군을 늦췄다. 명나라군은 후금과의 전투에서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슬쩍 후금군에 항복한다.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악화되지 않았다.

 

반면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는 명나라의 ‘재조지은’에 걸맞은 ‘숭명반청(崇明反淸)’ 외교를 공식 천명했다. 유연한 외교를 펼칠 수 없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두려움에 휩싸인 조정의 신료들은 내심 화친을 바랐다. 그러나 화친을 논하면 ‘오랑캐 세력’이라 낙인찍혔다. 입도 벙긋 못했다. 맹목적인 일변도 외교의 결과는 비참했다. 잇단 전란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사진은 삼전도비문). 60만명의 혈육을 청나라 인질로 보내야 했던 백성들은 못난 군주를 향해 울부짖었다. “임금이시여! 백성을 버리십니까.”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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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