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는 졸기(卒記)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다. 대개 “아무개 졸(卒)”이라고 쓴 후에 사관이 망자에 대한 세간의 혹은 자신의 평가를 서술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망자가 살았을 적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죽음에 대한 호칭이 달랐다. 대부(大夫), 즉 비교적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의 죽음을 ‘졸’이라고 불렀는데, 꼭 대부가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그 정도 지위에 있던 사람들의 졸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실릴 정도면 대단히 출세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졸기의 인물평은 대체로 무척 박하다. 드물게 후한 평가를 받은 인물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두 사람의 졸기를 기억한다. 먼저 이이의 졸기다.

 

이조판서 이이가 졸했다. 그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병이 생겼는데, 이때 병세가 악화되어 임금이 의원을 보내주었다. 이때 서익이 공무를 띠고 함경도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이를 찾아가 국경 방어에 관한 일을 묻게 했다. 이이의 자제들은 병을 염려해서 서익을 만나지 말라고 청했다. 하지만 이이는 “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라며, 억지로 일어나 서익을 맞아 입으로 6가지 방략을 불러주었다.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졸했다. 향년 49세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했다. 조정의 동료 고관들과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학생들, 문 지키는 병졸들과 상인들, 그 밖의 서관(庶官)·각 관청의 낮은 직급 관원들과 노비들까지 모두 달려와 통곡했다. 궁벽한 마을 일반 백성들도 서로 위로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하였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집결하여 전송했다.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서울에서 세 들어 살았고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구들이 수의(壽衣)와 부의(賻儀)를 거두어 염하여 장례를 치른 뒤에 조그마한 집을 사서 남은 가족에게 주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했다.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왔고, 활달하면서도 과감했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되고 진실하게 대했다. 은총과 사랑을 받든 오해나 미움을 받든,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가 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기에, 물러났다가 다시 조정에 나와서도 사류(士類)를 화합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사심 없이 할 말을 다 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 되었다. 세속의 여론은 그가 너무도 현실에 어둡다고 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이가 평소에 미리 염려하여 말했던 것들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정책들이 나중에 채택되었다.

다음은 류성룡의 3개 졸기 중의 하나이다.

 

3일 동안 조정의 조회를 중단하고 시전을 닫았다. 사신은 논한다. 도성(都城)의 시전 상인들이 빠짐없이 묵사동(현 충무로역 근처)에 모여 조곡(弔哭)했는데 그 숫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류성룡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각 관청의 늙은 아전 30여명도 와서 곡했다. 시전 상인들과 관청 아전 등이 류성룡의 본가(本家)가 청빈(淸貧)하여 상(喪)을 치르지 못할 것이라 여겨 포(布)를 모아 부의했다. 도성 안의 백성들이 곡한 일은 오직 이이와 유몽학이 죽었을 때뿐이다. 이이의 상은 서울에서 있었고, 유몽학은 관직에 있을 때 시전 상인들의 애로사항을 조정에 보고하여 백성들에게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사람이 오래전 낙향했고 상(喪)이 천리 밖에 있었는데도 온 성안 사람들이 빈집에 모여서 곡했다. 세상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데도 그를 이어 재상이 된 자들이 모두 전 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옛일을 떠올려 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들이 불쌍하다!

 

국회의원 노회찬이 사망했다. 진보정당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가진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고, 실제로 그가 속해 있는 정의당의 지지율이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시사토론이 있을 때마다 그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속 시원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많은 조문 인파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기록적인 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7만명 넘는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각자가 길게 늘어선 줄이 줄어드는 것을 오래 기다려 그를 조문했다. 발인하는 날에는 국회에서 청소하는 분들이 늘어서서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가난을 피하지 않고, 아무도 대변하지 않았던 이들을 대변했던 삶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역사이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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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