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25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 사이의 도로 공사장을 찾았던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원 교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목격한다. 백제왕릉이 확실한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간 현장을 보았다. 3호분 동쪽 15m 지점, 포클레인 삽날로 잘린 단면에서 백제 옹관과 함께 백제인의 갈비뼈와 다리뼈 등 인골이 노출돼 있었다. 개발에 눈이 멀어 자행된 무자비한 테러, 즉 역사 파괴의 현장이었다. 이 교수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행정기관에 호소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언론의 힘에 기대기로 했다. 언론 보도와 학술대회가 이어졌다. 2년간의 기나긴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985년 석촌동 고분을 중심으로 한 백제유적 정비계획이 수립됐다. 3~4호분 사이를 관통한 백제고분로는 지하도로 바뀌었고, 지상은 말끔히 복원됐다(사진). 사라질 뻔했던 한성백제 493년의 역사가 극적으로 회생한 순간이었다.

 

 

그랬다. 백제 창업주 온조왕은 ‘한수 이남의 비옥한 들판’에 도읍지를 건설했다. 이곳이 광주평원(송파구)이다. 개로왕은 화려한 궁실을 고쳐짓고 욱리하(한강)의 돌을 날라 무덤을 조성했다. 이것이 바로 드넓은 평야의 지명이 돌마을, 즉 석촌(石村)인 이유이다. 5곳의 돌무덤이 봉우리처럼 솟았다고 해서 오봉(五峰)이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는 290기가 넘는 고분이 이곳에 집중돼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74년 서울대 박물관이 날로 훼손되던 고분군을 발굴했지만 극히 일부 지역(1500평)만 사적으로 지정하는 우를 범했다. 이때라도 범위를 넓혀 지정하고 제대로 관리했다면 백제 인골이 포클레인 삽날에 나뒹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석촌동 고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무덤은 역시 3호분이다. 백제의 전성기를 개막한 근초고왕릉일 가능성은 없을까. 백제는 근초고왕부터 최전성기를 구가한다. 중국 측 사료인 <송서>와 <양직공도> <양서>는 백제가 중국 요서지방을 경영했다고 일관되게 기록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고, 역사서(<서기>)를 만들었으며,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랬으니 근초고왕설이 나오는 것이다. 아니라면 근초고왕의 맏아들인 근구수왕(재위 375~384)은 어떨까. 물론 확증은 아직 없다. 최근 석촌동 고분에서 10개 이상의 적석단위가 연접된 구조와 함께 제사를 지낸 흔적까지 확인됐다. 그러고 보면 석촌동은 한성백제 시대 왕과 왕족, 귀족의 공동묘지였음이 분명하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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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