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은 인간의 감정을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일곱 가지로 분류한다. 기쁨·분노·슬픔·즐거움·사랑·미움·욕망이다.  조선의 선구적 근대 지식인이었던 최한기는 일곱 가지 감정을 ‘좋음(好)’과 ‘싫음(惡)’ 두 가지로 압축했다. 최한기에 따르면 희로애락애오욕은 모두 좋고 싫은 감정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좋아하는 감정이 약하면 기쁨, 강하면 즐거움, 누군가를 향하면 사랑이다. 싫어하는 감정이 간절하면 슬픔, 격렬하면 분노,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 좋아하는 것에 다가가고자 하면 욕망이다. 인간의 감정을 좋음과 싫음 두 가지로 보는 관점은 단순한 구도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인간 본능이라는 점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생존에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해로운 것을 싫어하게끔 프로그램되어 있다. 기쁨, 즐거움, 사랑, 욕망은 생존에 이로운 것을 추구하게 만들려는 유전자의 미끼와 보상이다. 분노, 슬픔, 미움은 생존에 해로운 것을 회피하고 제거하려는 유전자의 경고와 반응이다.

 

동물적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감정에서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한 인물이 맹자다. 맹자는 선(善)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한 네 가지 감정에 주목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다. 맹자는 이를 네 가지 단서(四端)라고 명명했다.

 

‘단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선의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악의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가 불쌍해서 구해준다면 그 마음은 선의 단서다. 하지만 명문대 가기에 점수가 모자란 딸들이 불쌍해서 시험지를 빼내준다면, 그 마음은 악의 단서다. 감옥에 있는 전직 대통령이 불쌍해서 주말마다 태극기를 드는 마음이 선인지 악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모든 감정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수오지심’ 역시 선악의 가능성이 공존한다. 주자(朱子)의 해석에 따르면 ‘부끄러움’은 자신을 향한 감정이고 ‘미움’은 남을 향한 감정이라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미울 때도 있고, 남이 한 짓인데 부끄러움은 내 몫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최한기의 논리를 빌리자면, 부끄러움과 미움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무언가를 꺼리고(嫌) 싫어하는(惡) 하나의 감정이다. 따라서 수오지심을 혐오지심(嫌惡之心)으로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맹자는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라고 했다. 혐오는 정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독재를 혐오하지 않았다면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국정농단을 혐오하지 않았다면 촛불혁명은 없었을 것이다. 혐오가 없는 사회에는 정의도 없다.

 

혐오라는 감정 자체는 선악과 무관하다. 선을 혐오하면 악, 악을 혐오하면 선이다. 선악을 구분하는 세상에선 혐오의 가해자가 되는 것도, 피해자가 되는 것도 불가피하다. 공자는 모든 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선한 이가 좋아하고 악한 이가 미워하는 사람이 되라 했다. 선은 악의 혐오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진 사람이라야 제대로 남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고도 했다. ‘정당한 혐오’의 존재를 인정한 말이다.

 

모든 혐오는 악이며, 정당한 혐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당한 혐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혐오를 혐오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관용하면 불관용마저 관용할 수밖에 없는 ‘관용의 역설’처럼, 아무것도 혐오해선 안된다면 혐오마저 혐오할 수 없는 ‘혐오의 역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부당한 혐오의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당함의 죄이지 혐오의 죄는 아니다. 부당한 혐오는 대개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편견 탓이다. 혐오를 없애려면 편견을 없애야 하며, 편견을 없애려면 서로 다른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방법은 소통과 토론뿐이다. 그런데 뿌리 깊고 격렬한 혐오를 낳은 문제일수록 제대로 토론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혐오하는 쪽도 혐오받는 쪽도 서로를 격렬히 혐오한다. 편견에 사로잡힌 부당한 혐오가 문제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혐오를 죄악시하며 소통을 거부하고, 혐오의 프레임을 씌워 매도하는 행위는 또 다른 혐오를 조장할 뿐이다.

 

낯선 것, 모르는 것에 대한 혐오는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혐오의 감정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나 혐오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부당한 혐오는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혐오마저 금지하는 것은 부당한 혐오 못지않게 부당하다. 그것은 선을 향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폭력이다. 정당한 혐오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혐오한다. 불의를, 부정을, 부당한 혐오를, 그리고 혐오하지 말라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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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