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민용 기자 
 
ㆍ일부는 적진에 침투해 첩보활동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신화 속에서도 전쟁을 일삼은 인류는 사회를 만들면서 군대를 조직했다.
 
군대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전쟁 때면 여자들도 밥을 짓고, 군수품을 나르고, 부상병을 치료하며 전장의 한 자리를 지켰다. 한국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치마를 이용해 돌을 나르며 전투에 가담해 훗날 성 이름을 ‘행주산성’으로 바꿔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 등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군인 아닌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공식적인 여군의 등장은 19세기 후반에 이뤄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 중 여군을 뽑았고, 이스라엘도 유대 임시정부 때 여군을 조직했다.

한국은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지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무렵에 여성을 군에 흡수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국방부 일반명령 제58호를 근거로 1950년 9월6일 여자의용군 교육대가 발족되면서 여군시대 개막을 알렸다.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본부를 설치한 교육대는 제1기로 500여명의 지원자를 선발하고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쳐 같은달 28일 491명의 여군을 배출했다.

당시 여군은 후방에서 주로 행정·경리·통신 분야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일부는 전방 전투사단에 배치돼 정보수집·수색활동·선무활동에 참가하는가 하면 특수교육을 받고 적진에 침투해 첩보활동을 벌이기도 했다.이후 전선이 교착된 채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여군의 역할이 줄어들어 1951년 11월 여자의용군 훈련소는 해체되고 만다.

하지만 여군 기술사병 양성의 필요성에 따라 1953년 2월1일자로 육군보병학교에 여군교육대가 다시 창설돼 휴전 때까지 4기에 걸쳐 이곳에서 군사훈련과 병과기술훈련을 했다. 여군교육대는 1955년 7월 여군훈련소로 확충돼 독자적인 여군교육기관의 토대를 이뤘다.

이후 여군훈련소가 1990년 ‘여군학교’로 승격되는 등 군에서 여군의 비중은 점점 커져 갔다. 1993년에는 훈련소 연대장과 신병교육대 소대장직도 여군에게 개방되고, 1996년부터는 3군사관학교에서도 여자생도를 뽑았다.

이어 2002년 1월 여군 최초의 장군(양승숙 예비역 준장)이 나왔으며, 그 해 9월에는 공군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지난해에는 학군단 문호도 열려 여성 학군사관후보생(ROTC)이 60명 나왔으며, 올해는 그 규모가 지난해의 3배에 이를 전망이다.

여군은 창설 60여년 만에 우리 군의 핵심 전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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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