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목 기자

ㆍ한·일회담 반대에 비상계엄령

1964년 3월23일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한·일회담 일정에 합의했다. 다음날인 24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학생·시민들이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박정희 정권은 회담 유보를 결정했지만, 일시적 조치였다. 군사정권과 시민 간 갈등은 고조됐고, 6월3일 1만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대학생들은 청와대 길목까지 진입해 ‘굴욕 외교 중단’을 외쳤다. 한·일회담 반대가 주요 이슈였지만,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이라는 구호도 나왔다. 그래서 6·3은 4·19 저항정신을 계승하고 69년 3선개헌 반대운동과 73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잇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사정권은 시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군사정권은 4개 사단 병력을 투입, 1200여명을 체포했다. 7월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집회·시위가 금지됐다.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시간 연장 조치가 내려졌다. 군대를 동원해 법의 효력을 정지, 법의 공백상태인 ‘예외상태’를 만들어 치안과 사법권을 유지하는 계엄은 군사·독재정권의 작동 방식이자 통치기술이었다.

오늘은 6·3운동 46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본래 의미보다는 군사정권의 통치기술인 ‘계엄’이 다시 운위되고 있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최근 천안함 사건과 관련, “내가 이명박 대통령이었다면 그날(사건 발생일) 밤 당장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을 것이다. 그래야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까부는 놈들을 잡아넣었을 것 아닌가”라고 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공권력을 동원한 관권선거, 천안함 사건을 이용한 북풍선거, 돈살포와 돈공천의 금권선거, 비판세력을 탄압하는 공안선거, 온갖 선거 구태가 부활했다”며 “30년 전 계엄시대 선거냐”고 비판했다.

정치적 수사(修辭)로서의 계엄뿐 아니라 실제 여러 차례 적용됐던 통치기술로서의 ‘계엄’을 떠올리게 하는 징후도 나타났다. 대통령실 경호처장의 자의적 판단으로 집회·시위 자유를 제한하고 군대 동원까지 할 수 있게 한 ‘G20 정상회의 경호안전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6·3운동의 주동자로 계엄당국의 수배를 받고 결국 구속됐던 이명박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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