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목 기자

ㆍ6168명의 계엄군 ‘무차별’ 작전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 시내에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육군본부가 승인한 계엄군의 재진압작전 ‘상무충정작전’의 개시였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폭도들은 아직도 상당수의 무기를 통제하고 있고 주요 도로변에는 기관총을 배치하고 각종 장애물을 구축하는 등 양민을 협박하며 난동을 부리고 있다”며 진압을 명령했다.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 지점을 이미 차단했다. 시민군이 결집한 전남도청 내 시내전화와 전기를 끊었다. “폭도들은 투항하라”는 방송을 내보내며 주 목표물인 전남도청을 옥죄어 들어갔다.

작전에 동원된 전투요원은 장교 276명, 사병 5892명. 6168명의 계엄군이 전쟁과 살상의 대상으로 정한 ‘폭도’들은 157명이었다. 이들은 “끝까지 싸우겠다”며 전남도청 안에 남아 있던 시민군이었다. 중학생 3명, 고교생 26명도 포함됐다. 157명 중 15명이 사살당했다. “도청에 남아 심부름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겁니다”라며 항쟁지도부의 귀가 권유를 거부했던 문재학군(16)이 총탄에 맞아 죽었다. 이날 새벽 5시21분 제3공수 특공조가 도청에 진입하면서 시민군의 저항은 끝이 났다. 제1공수여단 특공조는 앞서 YWCA 안에서 있던 시민군 32명과 교전, 3명을 사살했다. 대법원은 훗날 5·18 사건 항소심판결문에서 이날 단행된 상무충정작전을 두고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된다고 판시했다.(김영택 <5월18일, 광주> 참고)

패배가 자명한 싸움에서 결사항전을 외치다 끝내 쓰러진 시민군 대부분은 공장·건설 노동자, 목공, 구두닦이, 웨이터, 일용품팔이 노동자였다.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는 <공통도시>에서 “항쟁의 후기에 조직된,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기동타격대는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잡색부대”라며 “자신의 존엄을 선언하기 위해 모인 이들 다중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거부한 권력주체, 즉 ‘제헌권력’”이라고 분석한다. “연대와 협력에 기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중권력기관”(조지 카치아피카스)이라는 분석도 있다. 기념의 대상으로 박제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5·18을 되살리는 일은 곧 ‘5월27일’ 그날 시민군의 의미와 지평을 확장하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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