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시절’의 정체성

신조어는 언제나 생겨나지만 오늘날은 더 많이 등장하는 듯하다. 그냥 문맥으로만 짐작하고 넘어갔는데, 언젠가부터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뜻을 찾아본다. 그렇게 알게 된 단어가 ‘리즈 시절’이다. 지나가 버린 전성기를 일컫는단다. 그렇다면 ‘리즈 시절’은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유용한 용어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

역사와 현실 2022.05.19 0

일본인은 정말 전쟁을 아는가

저명한 일본사학자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패전 후 일본을 이렇게 회상했다. “신주쿠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주변은 불탄 벌판이었고 검붉게 그은 함석으로 만든 판잣집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세탄 백화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략) 학교에 가보았더니 불타서 내려앉아 거무스름해진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전쟁에 진다는 것이 ..

역사와 현실 2022.05.12 0

장애인 시위에서 놓친 것들

장애인단체의 지하철 시위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예전 같으면 장애인단체의 요구는 불법 시위로 불편을 겪는 시민의 성난 목소리에 묻혀버렸을 텐데, 언론의 반응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시민의 불편을 언급했다가 뭇매를 맞고 장애인 혐오로 낙인찍힌 야당 대표를 보라.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할 만하다. 상반된 의견이 대립할 때 한쪽을 편들기는 쉽다. 시민의 불편을 부..

역사와 현실 2022.04.28 0

조선 시대 장관 임명 논란

선조 14년 병조 참판 윤의중(1524~1590)이라는 인물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차관에 있다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그러자 조정 언론을 담당하는 사헌부·사간원에서 반대 상소가 올라왔다. 내용은 이랬다. “윤의중은 해남의 미약한 가문 출신인데 처음 관직에 나왔을 때는 뛰어난 인재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직과 명예로운 직책을 차례..

역사와 현실 2022.04.21 0

‘뜨거운 감자’ 흥선대원군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병자호란 후 약 250년 만에 처음으로 2000명의 청군이 서울에 진주했다. 청나라는 민씨들에게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군란의 수모자라고 보고, 그를 청으로 납치했다. 국왕의 생부에 대한 전대미문의 행동이었다. 고종과 민씨들은 환호했지만, 기쁨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대원군이 귀국한다는 풍문이 들리..

역사와 현실 2022.04.14 0

호그와트 역사수업 유감

해리 포터가 다니는 호그와트 마법 학교에는 우리 같은 ‘머글’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흥미로운 수업이 가득하다. 비명을 질러대는 맨드레이크 같은 식물을 다루는 약초학 수업, 탁자를 돼지로 바꾸는 법을 가르치는 변신술 수업, 행운의 묘약을 만들 수 있는 마법의 약 수업까지. 이런 특이한 수업 속에 유일하게 머글도 수강할 만한 것이 있으니 바로 빈스 교수의 마법의 ..

역사와 현실 2022.04.08 0

수상한 ‘만인산 성명’

때는 구한말. 소격동 한 주사는 이 판서에게 줄을 대어 밀양군수에 임명된다. 무능력자가 관직에 오르면 결과는 뻔하다. 재정은 파탄지경, 군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임기가 끝나가자 한 주사는 유임을 위해 여론을 조작한다. 신문을 이용해 자신을 청백리로 포장하고 시정잡배를 동원해 ‘만인산’을 만들게 한다. 만인산은 1만 명의 이름을 적어넣은 양산이다. 선정을 베푼..

역사와 현실 2022.03.31 0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

지나간 시간과 사건들이 모두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당대인들의 생생한 경험과 기억이 소멸된 뒤, 역사가들이 주목하여 서술한 것들이 역사가 된다. 역사가들마다 동일한 사실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어떤 역사가가 서술 대상으로 선택한 사건이 다른 역사가에게는 선택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역사를 구성하는 내용이 반드시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마도 이번 3..

역사와 현실 2022.03.24 0

야성적 민주주의

지난 3월9일 대통령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박빙의 차이로 나온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선거 불복에 대한 우려였다. 사전투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잡음이 있었던 터라, 어느 쪽이든 패자가 승복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5년 전에도 큰 걱정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 탄핵 시위 군중을 보면서, 혹시 폭력사태가 나면 어쩌나 했다. 불복과 폭력은 문자 그대로..

역사와 현실 2022.03.17 0

나의 미시사가 거시사와 만날 때

나는 친할머니가 참 어려웠다. 내 할머니는 포용과 사랑이 아니라 까다로운 예절 교육의 아이콘이셨다. 할머니가 오시면 늘 절을 하며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이렇게 절을 올리는 것은 내 세대에는 이미 일반적이지 않은 관습이었다. 절을 올릴 때면 상당히 긴장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팔의 각도, 어깨 자세 등을 놓고 또 한 소리를 들었고, 사촌들과 나란히 절을 할 때면 절에 대한 품평까지 각오해야 했다. 밥상머리에서 식사..

역사와 현실 2022.03.10 0

‘국뽕’의 시대

“김치의 원조는 파오차이, 한복의 기원은 중국 전통 의상.” 반중정서에 기름을 부은 발언이다. 그런다고 세계인이 김치와 한복을 중국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중국이 주장하는 ‘만물 중국 기원설’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남을 탓하려면 먼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역사를 왜곡하는 그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떳떳한가..

역사와 현실 2022.03.03 0

율곡 이이에 비친 개혁의 궤적

선조 2, 3년 무렵 이이는 조정에 모인 패기만만한 수재형 관리들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존재였다. 그의 나이 34, 35세 무렵이다. 선조 즉위(1567) 무렵 사림의 주요 세력인 양심적 지식인과 젊은 관리들은 50년이나 계속된 정치적 암흑이 걷히고 개혁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정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중종·명종 대 구시대 기성 정치인들인 구신(舊臣)들을 깊이 혐오했다. 이이는 신진 엘리트 관리들을 대표해 이..

역사와 현실 2022.02.24 0

이상화의 ‘편파해설’

얼마 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봤다.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의 경기를 중계하던 이상화 해설위원의 모습이다. 화면을 보지 않았다면 한국 선수 경기로 오해할 뻔했다. 이상화는 시종 편파적으로(?) 고다이라를 응원하다 뒤처지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안타까워했다. 고다이라 선수의 격차가 벌어지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표정과 눈물에 가득 찬..

역사와 현실 2022.02.17 0

소풍 김밥과 사실, 그 너머 진실

3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많은 부모가 긴장하고 있을 듯하다. 이 편식하는 꼬맹이가 학교 급식은 먹을지, 화장실은 제대로 갈지, 왕따라도 당하는 건 아닐지 모든 게 걱정스러울 뿐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소풍 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교우관계에 촉각이 곤두서있던 터라 소풍에서 귀가한 애에게 누구랑 김밥을 먹었는지부터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이..

역사와 현실 2022.02.10 0

세는나이를 내버려두라

맬컴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캐나다 프로 하키 선수는 1~3월생이 많다. 어째서일까. 어릴 적에는 개월 수에 따라 성장차가 크다. 같은 해 태어난 아이들끼리 경쟁하면 1~3월생이 유리하다. 그 차이가 유소년 리그와 청소년 리그를 거쳐 성인 리그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초등학교 6년 내내 학급에서 키가 가장 작았던 이유를. 내 생..

역사와 현실 2022.02.03 0

왕조의 자연 수명

이븐 할둔(1332~1406)은 북아프리카 중부의 튀니스에서 출생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망한 역사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건국 후에 사망한 이색과 이성계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사하라 이북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전통이 뿌리 깊은 곳이다. 이븐 할둔은 자기 생애에 이미 이 지역에 있었던 여러 왕조에서 그 학문적 명성이 높았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

역사와 현실 2022.01.27 0

점입가경, 일본의 혐한

일본의 혐한 풍조가 점입가경이다. 혐한이 하나의 풍조가 된 지 오래지만, 한국 때리기가 ‘장사’가 되자 명색이 언론이라는 매체들까지 노골적으로 혐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어느 종합잡지는 한국에 대해 ‘격분과 배신’이라는 표현을 썼고, 또 다른 주간지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인의 병리라는 내용의 기사까지 내보냈다. 이런 상황에 대..

역사와 현실 2022.01.20 0

마늘이 알려준 이야기의 힘

미국에서 ‘파머스 마켓’에 간 적이 있다. 저렴하고 복작대는 시장 구경을 기대하며, 일정과 장소를 확인하려고 본 파머스 마켓의 홈페이지는 뭔가 예상과 달랐다. 아주 거창한 임무와 비전을 제시하며 특별한 척한다는 느낌을 준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동네 파머스 마켓의 임무는 이러했다.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작은 지역 농장을 지원..

역사와 현실 2022.01.13 0

분서와 훼판

분서와 훼판은 조선시대의 금서 조치다. 분서는 시중에 유통되는 책을 모조리 수거해 소각하는 것이고, 훼판은 판목을 파괴해 더 이상 출판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분서와 훼판은 책의 생산과 유통을 금지하는 방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체제를 위협하는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탄압했다. 조선은 어느 나라보다 사상 통제가 엄격했지만, 국가가 분서와 훼..

역사와 현실 2022.01.06 0

국가가 할 수 있는 일

2013년 그리스는 재정위기에 놓여 있었다. 즉시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유로존에서 퇴출될 상황이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구제금융 실시 결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사실상 결정권은 독일이 가지고 있었다. 독일 국민 여론은 구제금융 실시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구제금융이 실시됐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유럽중앙은행은 유로화 사용 15개국의 국가별 가계 자산을 발표했다. 그 ..

역사와 현실 2021.12.30 0

‘타는 목마름’으로만 되던 시대는 갔다

얼마 전 중국 국무원이 ‘중국의 민주’라는 백서를 발간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10개 국가를 모아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여는 데 대한 대응이었다. 한때 중국은 선거, 다당제, 인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인정하면서 서방의 민주주의 공세에 수세적인 자세를 보인 바 있다. 그런데 예상대로 이번에는 ‘민주주의 모델은 하나가 아..

역사와 현실 2021.12.23 0

동래 할머니

경상도 동래부(현 부산)에 한 여성이 있었는데 극심한 가난을 이기지 못해 몸을 팔아 겨우 끼니를 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선조 25년, 1592). 왜적이 온 나라의 보물을 훔쳐갔는데, 그들은 여성들도 닥치는 대로 붙들어갔다. 동래의 불쌍한 여성은 이미 30여 세도 넘었으나 일본으로 끌려가 10여 년 동안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살았다. 미수 허목이 쓴 ‘동래 할..

역사와 현실 2021.12.16 0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저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자기소개서에 넣으면 반드시 떨어진다는 마법의 문장이다. 인사담당자의 눈에는 진부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모양이다. 물론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는 죄가 없다. 아무렴 기업이 주정뱅이 아버지와 바람둥이 어머니 밑에서 자란 지원자를 선호하겠는가. “우리집은 어려서부터 가난했었고”로 시작하는 신파극형 자..

역사와 현실 2021.12.09 0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서울역그릴과 ‘Since 1925’의 간극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96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첫 양식당 ‘서울역그릴’이 11월30일 문을 닫았다. 몇 년만 더 버티면 100년인데,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한다. 하지만 서울역그릴의 퇴장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래서 더 아쉽다. 서울역그릴은 1925년 10월 옛 서울역사(驛舍) 2층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옛 서울역사는 1925년 9월 준공되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중앙 건물엔 비잔틴풍의 돔을 얹었고 앞뒤 네 곳에 작..

역사 칼럼 2021.12.03 0

현실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고려 말 가장 큰 개혁 과제도 경제, 즉 먹고사는 문제였다. 당시는 농업이 기간산업이었고 경작지 관련 폐단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가장 적나라한 폐단은 권력을 가진 지배층 일부가 토지문서를 위조해서 남의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기존 권력자들을 밀어내고 등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은 정치 권력만 잃었지, 힘 있을 때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은 땅을 여전..

역사와 현실 2021.12.02 0

역사교육, 다시 ‘우물 안 개구리’로 유턴?

교육부가 2012년부터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 온 교과목 <동아시아사>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동양사학회와 일본사학회를 비롯한 관련학계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동아시아사>는 주로 한·중·일 3국의 역사를 비교사의 시각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교과목 창설 당시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얻은 바 있다. 한국고대사 연구로 저명한 와세다 대학의 이성시(李成市) 교수가 사석에서 ‘한국이 아니고서는..

역사와 현실 2021.11.25 0

안도 다로, 신미양요의 그늘에 숨은 일본의 촉수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들이 벌인 소동은 그보다 4년 전에 일어난 신미양요를 본뜬 것이었다. 1871년 6월, 미국은 조선 원정을 목적으로 군함 5척을 강화도로 파견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지만, 미 군함에는 영어에 능통한 일본 외무성 하급 관리 한 명이 동승하였다. 안도 다로(安藤太郞, 1846~1923)였다. 사건이 벌어지기 석 달쯤 앞서 일본 외무성에서 부산에..

역사와 현실 2021.11.18 0

육식은 죄악이 아니다

채식이 생명을 위하는 길이라는 관념은 고대 인도의 산물이다. 모든 생명은 윤회하므로 동물을 먹는 건 사람을 먹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관념이다. 채식은 괜찮다. 식물은 윤회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육도윤회에 식물은 포함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식물을 생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식물도 생명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고, 피가 튀지 않는다고 생명이 아닌 것은 아..

역사와 현실 2021.11.11 0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흥미로운 풍경을 담은 맥주들

얼마 전 유튜브를 뒤적이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를 다시 들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라디오의 심야 음악프로그램. 다시 들은 건 1981년 9월 어느 날 방송분이었다. 시그널 뮤직에 앞서 광고방송부터 흘러나왔다. “새 시대를 앞서 가는 여러분의 문화방송입니다. 오리엔트 아날로그. 수정 손목시계 오리엔트 아날로그. 오리엔트시계 제공 시보 11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곤 귀에 익은 시그널 뮤직, 이종환 특유의..

역사 칼럼 2021.11.05 0

잠곡 김육의 소통법

조선시대에 잠곡 김육(1580~1658)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조선의 조세개혁 정책인 대동법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말을 덧붙이면 아마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는 조선의 전형적인 개혁관료였다. 김육을 언급할 때면 조심스럽다. 그의 성취가 조선왕조의 무능함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는 전혀 다르다. 무..

역사와 현실 2021.11.04 0

진영을 넘나든 정치가들의 활극, 메이지유신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져가던 1860년대 막부에는 가쓰 가이슈(勝海舟)라는 인물이 있었다. 낯선 이름이지만 일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멘토로 유명하다. 최하급 신분이었음에도 출중한 능력으로 요직에 발탁되었다. 당시는 사쓰마, 조슈를 중심으로 한 반막부 세력이 막부에 도전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가쓰는 이 진영 대립의 시기에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막부가 권력을 독차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역사와 현실 2021.10.28 0

털끝만큼의 차이

“털끝만 한 차이에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일어난다.(毫釐之差 天壤以謬)” 16세기 조선의 대학자 이언적은 이렇게 말하며 매사에 신중을 더하였다(<회재집>, 6권). 처음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시간이 갈수록 그 틈이 벌어져 결국에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깨침은 본래 유학자들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8세기 중국 불교의 고승에게서 나왔다(승찬, <신심명>). 옛날 명의들도 ‘..

역사와 현실 2021.10.21 0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수나라 문제 양견은 태어날 적부터 손에 ‘왕’자가 새겨져 있었다. 손금이 ‘왕’자 모양이었나 보다. 그는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 믿었다. 황후의 아버지로서 대장군의 자리에 오르고도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아홉 살짜리 황제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양견은 아들 양광의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양광은 희대의 폭군 수양제다. 수양제의 죽음과 함께 수나라는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역사와 현실 2021.10.14 0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동남사 사진기에 담긴 ‘추억의 흔적’

사진기가 귀했던 1970~1980년대, 사람들은 주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증명 사진, 가족 사진, 백일 사진, 돌 사진. 그 시절의 사진관 사진기는 큼지막한 것이 많았다. 삼각대 위에 사진기 본체(암함·暗函)를 올려놓고 사진사는 검은 천을 뒤집어쓴 채 렌즈를 조절하고 셔터를 누르곤 했다. 그 커다란 사진기가 참 인상적이었는데. 전남 순천시 도심에 가면 동남사진문화공간이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그 옛날의 큼지막..

역사 칼럼 2021.10.08 0

역사가 위안이 될까

2020년 1월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가 2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 이 상황이 이렇게나 오래도록, 그것도 다양하게 악화되며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이 많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피해가 덜하다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생각해보면 객관적 환경만으로는 한국이 전염병 차단에 결코 유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은 수입과 수출이 많은 나라이니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어느 나라보다 활발하..

역사와 현실 2021.10.07 0

한·일 대학생 ‘일본 인식의 덫’ 넘어서기

지난 9월17일 한·일 대학생들 간에 한·일관계를 주제로 한 토론이 있었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와 포니정재단이 마련한 자리였다. “일본 학생들이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은 없이 K팝이나 한류 드라마를 그냥 소비하는 건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한 학생이 말하자, 바다 건너(온라인 회의) 한 학생이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 학생들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역사의식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

역사와 현실 2021.09.30 0

‘천고마비’를 쓰레기통에 내버리며

이맘때 자주 듣는 구절이 하나 있다.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맞아 오늘의 행사가 더욱 즐겁고 유익할 거라는 식으로, 판에 박힌 훈화를 늘어놓으셨다. 가을 하늘이 맑고 투명한 것(천고)은 쉽게 수긍이 되지만, 하필 왜 말이 살찌는(마비) 계절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일까. 가을에는 풀이 성장을 멈춰 말 먹이가 외려 부족해지는 것은 아닐까. 가을의 아름다움과 말의 살집이 무슨 관계인지 이..

역사와 현실 2021.09.23 0

장원급제는 실력이 아니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하는 ‘공원춘효도’와 ‘평생도’의 소과응시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두 그림의 구도는 비슷하다. 곳곳에 커다란 양산이 펼쳐져 있고, 양산 아래마다 예닐곱 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답안을 작성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각자 답안을 쓰는 게 아니라 하나의 답안을 공동으로 작성하고 있다. 김홍도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부정이 난무하는 과거제도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

역사와 현실 2021.09.16 0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성냥이 그리워질 때

근대 문물이 가장 빨리 들어온 곳, 인천 개항장. 이곳의 여러 박물관을 둘러보면 유독 두드러진 전시물이 있다. 성냥이다. 조금 떨어진 동인천역 배다리에는 성냥 전문 박물관도 생겼다. 몇 해 전엔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근대기 성냥과 불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렸다. 왜 성냥일까. 한 시절, 인천이 성냥의 메카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성냥공장이 처음 생긴 것은 1880년대 중반. 이보다 10여년 앞서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성..

역사 칼럼 2021.09.13 0

민주화 이후의 훈구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대개는 ‘훈구’라는 말을 기억한다. ‘훈구’와 ‘사림’은 시험에도 자주 나왔다. 대략 사림이 좋은 쪽이라면 훈구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다. 조금 더 들어가면 두 세력 사이에 여러 번의 ‘사화’가 있었다는 것도 연상된다. 훈구가 사림을 박해해 귀양 보내고 죽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훈구(勳舊)라는 말 자체는 본래 좋은 뜻이다. 국어사전에 “대대로 나라나 군주를 위하여 드..

역사와 현실 2021.09.09 0

나이와 역사

역사를 읽을 때 등장인물의 나이를 염두에 두려고 노력한다. 보통 나이는 안 쓰여 있기 때문에 따로 신경을 써야 한다. 살다보면 한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나이나 그가 속한 세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역사상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몇 살이었는지, 이하응은 대원군으로 집권할 때 어느 정도 나이였는지를 감안하며 책을 읽으면 더 실감난다. 이하응은 44세에 그 자리에 올..

역사와 현실 2021.09.02 0

남편을 윽박지르는 조선의 억센 아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많이 들어본 말인데, 중국 고대에 왕촉이란 학자가 한 말이다. 이 말을 근거로 후대에는 신하의 의리와 아내의 도리를 단정하는 경향이 심하였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신분의 고하를 떠나서 홀로 된 모든 여성에게 수절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왕촉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공자와 맹자만 하여도 왕을 버리고 나른 나라로 떠나가기 일쑤였..

역사와 현실 2021.08.26 0

진심은 언제부터 빈말이 되었나

최창대(1669~1720)가 병으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던 때의 일이다. 소동파의 시를 읽다가 “병으로 한가로운 것도 나쁘지 않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 이 구절을 부연하여 ‘진심음(眞心吟)’이라는 제목으로 9편의 시를 지었다. 9편 모두 “병으로 한가로운 것도 나쁘지 않으니, 한가로워야 진심이 드러난다(因病得閒殊不惡 得閒因得見眞心)”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바쁜 일상에서는 진심이 드러..

역사와 현실 2021.08.19 0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양조장의 추억

지금이야 맥주 브랜드가 넘쳐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비’는 맥주의 대명사였다. 오비맥주의 뿌리는 19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의 기린(麒麟)맥주는 서울 영등포에 맥주공장을 지었다. 그것이 훗날 동양맥주, 오비맥주로 이어졌다. 영등포역 바로 옆 드넓은 공장은 오랫동안 우리나라 맥주의 상징공간이었다. 오비맥주는 1997년 경기 이천으로 공장을 옮겼다. 그러면서 공장 건물과 굴뚝을 모두 철거했다...

역사 칼럼 2021.08.13 0

공론과 공정

1579년 5월, 낙향해 있던 율곡 이이가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낙향한 지 3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자신을 사간원 수장인 대사간에 임명한다는 문서를 받자, 이를 사양하며 올린 상소였다. 조선시대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조정 언론을 주도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조정에서 이이를 대사간에 임명한 이유는 분명했다. 4년 전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며 시작된 당쟁이 이제 아무도, 심지어 왕조차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

역사와 현실 2021.08.12 0

‘민족’과 ‘자유’도 일제 잔재?

한 광역자치단체 교육청의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친일행적이 있는 작곡가가 지은 교가, 동서남북 등 방위명이나 ‘○○제일고등학교’ 같은 순서가 들어간 교명을 바꾸고, 그 외에도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찾아내는 데 수억원의 세금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일제 용어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반장’ ‘훈화’ ‘휴학계’ ‘파이팅’ ‘간담회’ 등이 꼽혔다. 이..

역사와 현실 2021.08.05 0

성종의 균형감각

성종은 신구세력의 협치를 원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옥좌에 올랐고, 그때 조정은 기득권층인 훈구파로 가득했다. 성종은 그들을 견제하려고 개혁을 바라는 신진사류를 조금씩 끌어들였다. 세월이 흐르자 조정 안에는 신진사류의 숫자가 늘어났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졌다. 알다시피 신진사류는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선비들이었는데, 왕은 그들을 언관으로 삼아 조정의 잘잘못을 따지게 했다. 이러한 정책은 효과가 있..

역사와 현실 2021.07.29 0

조선 금속활자의 실체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출토되었다. 이미 그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실물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발견이다. 특히 이 중에는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앞서는 갑인자(1434)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선 고려시대부터 금속활자를 사용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떠오른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지식의 확산을 촉진하여 사회 변혁..

역사와 현실 2021.07.22 0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광주극장과 원주 아카데미극장

서울 종로3가의 서울극장이 8월31일 문을 닫는다고 한다. 얼마 전 그곳에서 <자산어보>를 보았는데…. 서울극장 폐관 소식을 듣고 광주 충장로에 있는 광주극장이 떠올랐다. 1935년 문을 연 광주극장. 당시 ‘조선 제일의 대극장’이란 찬사를 받으며 호남지역 대표 극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1968년 화재로 극장이 모두 타버렸고 다시 건물을 지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주 광주극장을 다녀왔다. 4년 만이었다..

역사 칼럼 2021.07.16 0

국민 지원금

‘국민 지원금’ 지급 기준을 놓고 정부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듯하다. 크게 보면 전 국민에게 지급하자는 쪽과 일부에게만 지급하자는 쪽으로 나뉜다. 조선시대에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 1645년 조선은 파열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핵심 재정관료 이시방은 자기 일기에 이렇게 썼다. “충청도와 전라도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다. 나라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미곡 운반의 일을 겨우 넘기고 나니, 뜻밖에 불행한 일을 당..

역사와 현실 2021.07.15 0

두 세력의 개혁 경쟁과 개방 경쟁

메이지 정부는 수립 직후인 1868년 초 곧바로 ‘대외화친의 조서’를 발표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열강과 맺은 조약을 계승하고, 우호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었다. ‘존왕양이’와 ‘조약파기’를 부르짖으며 막부 타도파를 지지해온 많은 사무라이들은 아연실색했다. 막부의 ‘저자세 외교’를 공격하며 집권한 새 정부가 서양에 강경한 자세를 취할 거라는 기대가 초장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사실 막부 타도파의 지도자들은..

역사와 현실 2021.07.08 0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

서애 유성룡이 이순신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잘 협력해 공훈을 이루기를 기원하노라고 썼다(<서애선생 별집> 제3권). 진린은 명나라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동안 당진에 정박했다. 그러다가 남쪽으로 가서 이순신과 함께 지낼 예정이었다. 진린은 포악하고 교만했다. 선조가 멀리 양주(청파)까지 가서 전송할 때도 그는 조선의 관리를 폭행했다. 유성룡은 친구 이순..

역사와 현실 2021.07.01 0

역사의 묘정

묘정(廟庭)은 역대 국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의 다른 이름이다. 그 국왕의 심복이었던 신하의 위패도 함께 모신다. 배향공신이라고 한다. 생전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다. 배향공신으로 선발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나라가 망해서 종묘가 없어지지 않는 한, 배향공신은 두고두고 국왕과 함께 제사를 받는다. 배향공신의 수는 국왕마다 다르다. 적으면 한두 명, 많으면 예닐곱 명이다. 이들은 국왕..

역사와 현실 2021.06.24 0

퇴<退>, 회<晦>, 잠<潛>

최근 능력주의에 대해 익숙하게 들었던 것과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는 ‘개천에서 난 용’의 신화가 있었다. 능력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개천에서 난 용’들은 공적 직무에 따른 권한을, 자기 능력으로 획득한 일종의 트로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나온 맥락이다. 그랬던 ‘능력주의’가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 ‘능력..

역사와 현실 2021.06.17 0

근대 일본의 묻혀진 목소리들

근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제국주의 시대였던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들은 환호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 했고,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조차도 ‘의전’으로 칭송했다. 청에 맞서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명분이었다. 승전 후 일본은 조선 독립은커녕 세력을 더 확대하기 위해 군비 증가에 열을 올렸다. 이..

역사와 현실 2021.06.10 0

세상을 일깨우는 죽비 같은 책 ‘칠극’

방적아(龐迪我)라는 낯선 이름을 아실까 모르겠다. 본명은 디다체 데 판토하. 스페인 사람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과 안정복의 저술을 비롯해 여러 문집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방적아가 유명해진 것은 <칠극(七克)>이라는 책을 썼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칠극>은 <천주실의>와 함께 가장 인기 있었던 서학 서적이다. 이 책은 성리학자들의 애독서인 <사물잠>과 유사하다. <..

역사와 현실 2021.06.03 0

장인어른, 장모님인가 아버님, 어머님인가

한강 정구가 퇴계 이황에게 물었다. “아내의 친족을 형, 아우, 숙부, 조카라 부르고, 아내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아내의 서열을 따르는 풍습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퇴계가 대답했다. “오늘날 아내의 친족 호칭이나 아내의 서열을 따르는 풍습은 모두 옳지 않다. 아내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풍습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 우리 결혼문화는 조선 중기까지 데릴사위제가 대세였다. 최근..

역사와 현실 2021.05.27 0

‘요승’ 신돈

고려가 원나라에 정치적으로 지배받던 ‘원간섭기’처럼 개혁이 끊임없이 시도되었던 때도 없다. 개혁이 끊임없이 시도된다는 것은 개혁이 계속 실패했다는 뜻이다. 그 마지막 시도가 공민왕 때 있었다. 그의 개혁이 실패하자 그다음으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널리 알려졌듯이 조선을 건국했다. 사회의 환부가 너무 깊었고,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의 힘이 너무 강력했고, 그로 인한 갈등의 격렬함이 결국 새 왕조 건국으로 귀결..

역사와 현실 2021.05.20 0

천황인가, 일왕인가

칼럼을 쓰다보면 신문사에서 일본 천황을 곧잘 일왕으로 고친다. 일본의 임금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해방 후 오랫동안 천황이라 불러왔으나, 대략 1990년대부터 매스미디어는 일왕이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천황이라고 한다. 이낙연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강창일 주일대사가 부임했을 때도 천황이라 불렀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발발하자 일본은 조선에 신정부 승인을 요청했다가..

역사와 현실 2021.05.13 0

역사에 밝았던 이순신이란 사람

김육이란 정승이 이순신의 역사적 식견에 관해서 쓴 짧은 글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잠곡유고> 제13권). 이순신이 무과 시험을 볼 때 시험관이 물었단다. “한나라의 장량은 적송자란 신선과 함께 노닐었다고 <무경>에 나와 있다. 장량은 과연 죽지 않았던 것인가?” 그러자 이순신이 이렇게 대답했다. “한나라 혜제 6년(기원전 189년)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고 <자치통감강목>에 적혀 있습니다. 어찌 죽지 않았을 리가 있었겠..

역사와 현실 2021.05.06 0

아전인수식 선거 분석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결과를 놓고 아직도 말이 많다. 결과야 일찌감치 나왔지만 원인 분석이 제각각이라 그렇다. 데이터 분석에서 무엇보다 주의할 점은 정해놓은 결론에 끼워맞추는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만큼 아전인수식 해석이 난무한 적도 없는 것 같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텍스트 해석과 데이터 분석에 종사하는 연구자로서 분석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선거 결과로..

역사와 현실 2021.04.29 0

개혁 앞의 목은 이색

이색은 고려 말 최고의 학자였고 최고위 관직을 지냈다. 그와 같은 연배로 그의 학문적·사회적 명망을 앞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 이곡에 이어 그도 고려와 원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고려 말 고려의 관료와 지식인들이 느끼는 원나라의 힘과 권위는 아마도 오늘날 한국 지식인과 관료들이 미국에 대해 느끼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색의 명망은 개인적 탁월함 때문만도 아니다. 그는 과거시험을 4번이나 주관했다. 고..

역사와 현실 2021.04.22 0

우리들의 평양감사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는 세 폭짜리 ‘평안감사향연도’를 아실 것이다. 몇 달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한 작품이다. 대동강을 무대로 펼쳐진 풍속화인데, 영조 21년(1745년)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때 작품이라면 그림 속 평안감사는 이종성이었다. 영조 21년 4월5일, 이종성은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실록> 참조). 그는 당대 명인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도세자가 궁지에 빠졌을 때 최선을 다..

역사와 현실 2021.04.08 0

유튜브 단상

며칠 전 베트남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올린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베트남에 와서 하면 안 되는 것들이라는 주제를 담았는데, 그중 하나가 인상적이다. 절대로 정부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베트남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정부 비판에 대해 권위주의적 억압을 가하는 것은 중국도 다르지 않다. 한국도 한 세대 전에는 그랬다. 지인에게 들은 바로는 일본인들도 정치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사회계층이 따로..

역사와 현실 2021.03.25 0

식민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

몇 해 전 외신기자단 회견에서 한 일본 기자가 우리 관료에게 “식민지 문제에서 일본이 뭘 어떻게 더 하라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우리 관료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답했다. 악의에 찬 질문에 대해 우리 국민의 감정을 표현한 말이었지만 외신기자들은 두고두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편적인 여성 인권 문제였던 위안부 이슈와 달리, 식민지 문제는 국제사회의..

역사와 현실 2021.03.18 0

이순신의 죽음

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조정에서는 수군을 없애려고 했다. 신립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자 이순신이 급히 글을 올려 수군이 중요한 이유를 조목조목 진술했다. 대신들은 그 글을 읽고 생각을 바꾸었다. 윤휴의 <백호전서>(제23권)에 기록된 내용이다. 윤휴는 충무공 이순신의 삶을 깊이 연구해 ‘통제사 이충무공의 유사’라는 글을 지었다. 마침 그의 서모(庶母)가 이순신의 딸이라, 윤휴는 이순신을 곁에서..

역사와 현실 2021.03.11 0

무엇을 위한 기념일인가

지난달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한 ‘이십공신회맹축(二十功臣會盟軸)’은 1680년 열린 회맹제를 기념하여 만든 문서다. 24m에 달하는 이 문서는 원형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관련 기록도 충실하여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만큼 국보로 지정하기에 손색이 없다. 회맹제는 공신과 그 자손들이 모여 공신 책훈을 기념하고 국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이다. 연례행사는 아니지만 국가 주관의 공식 행사인 만큼 오늘날의 국가기..

역사와 현실 2021.03.04 0

지혜로운 어려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조선은 개혁의 나라였다. 조선이 성공시킨 개혁들 중에 대동법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가 가장 하기 어려운 게 세금제도 개혁이다. 그 내용이 파격적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한 마을에 10가구가 산다고 치자. 대동법 이전에는 빈부와 무관하게 가구별로 1년에 100만원씩 냈다. 실제 현실은 그보다 더 안 좋았다. 수령과 가깝거나 힘 있는 가구는 세금을 안 내거나 100만원보다 적게 냈다. 대..

역사와 현실 2021.02.25 0

세종의 ‘문명적 주체’ 만들기

광화문에는 두 개의 동상이 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화폐에도 이 두 분은 등장한다. 왜 이 두 명일까. 이순신 장군은 일본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했기 때문이고, 세종대왕은 ‘민족의 문자’ 한글을 발명한 분이기 때문일 게다. 두 경우 다 동상까지 세워진 이유는 ‘민족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차치하고 세종의 경우는 좀 생각해볼 만한 지점들이 있다. 세종은 한글창제만 한 게 아니..

역사와 현실 2021.02.18 0

기생 두향과 퇴계 이황의 사랑, 진실은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함초롬한 초봄의 매화를 떠올리니 내 생각이 퇴계 이황을 향한다. 그처럼 매화시를 많이 읊은 선비는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퇴계는 매화분에 물을 주라며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퇴계의 매화 사랑은 기생 두향(杜香) 때문이었다고 한다. 화분에 물을 주라는 유언도 두향을 부탁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두향은 충북 단양 사람인데, 절세가인과 대학자의 아름다운 인연이라니, 송..

역사와 현실 2021.02.15 0

[여적]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누구나 한번쯤은 ‘우리나라 국보 1호는 무엇이냐’는 문제를 접했을 것이다. 정답은 물론 ‘남대문’이다. 지금은 숭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남대문은 누구나 기억해야 할 부동의 ‘국보 1호’였다. 그래서 숭례문은 국보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은연중 여겨졌다. 20여년 전 국보 1호 논쟁이 뜨겁게 일었다. 학계 일부가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팔만대장경과 같은 문화재를 국보 1호로 재지..

역사 칼럼 2021.02.10 0

진상품 마케팅

진상품은 국왕에게 바치는 지방 특산물을 말한다. 진상품의 종류는 조선시대 재정 백서 및 지리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전부 식재 아니면 약재다. 음식을 진상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향토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진상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부산의 향토음식 동래파전은 삼월 삼짇날 동래부사가 진상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냉동탑차도 아이스박스도 없는 조선시대에 부산 동래구에서 서울 종로구까지 파..

역사와 현실 2021.02.04 0

고리대와 가계부채

매년 통계청과 한국은행, 금융감독원이 함께 ‘가계금융·복지조사’라는 보고서를 낸다. 이에 따르면 2020년 3월 말 기준 가구당 평균 부채는 8256만원이다. 자영업자는 사업자금으로, 무주택자들은 전세가격 상승으로, 집을 구입한 사람들은 주택가격 상승으로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심지어 많은 대학생들이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이미 학자금 대출 부담을 안고 있다. 위 액수에는 작년 코로나19로 악화된 상황이 반영되지..

역사와 현실 2021.01.28 0

청일전쟁

1896년 5월 모스크바에서는 세기의 외교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주요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긴장에 휩싸여 있던 동아시아 각국도 거물들을 파견했다. 청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내정과 외교를 주물러왔던 이홍장이 왔다. 청일전쟁에서 그의 북양함대가 참패하는 바람에 세력은 많이 꺾였지만 국제적으로도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역사와 현실 2021.01.21 0

작은 일은 작게 다뤄야

남명 조식은 이름난 학자였다. 귀정 이정도 학행이 뛰어난 선비여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아꼈다. 그들은 진주에 사는 진사 하종악과도 밀접한 사이였다. 조식의 여조카는 하 진사의 아내였고, 이정의 첩은 하 진사의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하 진사의 아내인 조씨가 일찍 죽어, 그는 함안 이씨와 재혼하였다. 일설에는 이씨가 이정의 첩과 인척이라고 하였다. 얼마 후 하 진사 역시 사망해 이씨는 과부가 되었다. 어찌 된 셈인지 그..

역사와 현실 2021.01.14 0

국민사은대잔치

‘고객사은대잔치’라는 행사가 있다. 기업이 고객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뜻에서 준비하는 이벤트다. 대개는 경품 행사다. 1등 경품은 어마어마하다. 승용차 정도는 보통이다. 한때는 억대의 현금이나 귀금속을 주기도 했다.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비난 탓에 규모가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가의 경품을 주는 행사가 드물지 않다. 그런데 경품은 운 좋은 사람의 차지다. 정작 충성 고객은 아무 혜택도 받지 못한다. 정말 고..

역사와 현실 2021.01.07 0

‘소학’의 무리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마치 선과 악의 대립처럼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사림이 처음에 훈구세력에게 문제 제기를 했을 때 거기에는 정당한 면이 많았다. 사림이 맞은 역풍이 기묘사화(1519)다. 기묘사화 후 훈구는 사림을 “소학의 무리”라 불렀다. 조롱하는 말이었다. 어느 국가나 건국 후 3세대 정도가 지나면 지배집단 내부에 일정한 변화가 나..

역사와 현실 2020.12.31 0

기묘사화의 역사적 진실

중종 14년 11월15일 밤, 갑자기 대궐 안이 시끄러웠다.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이 허둥지둥 나가 보았더니, 연추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근정전에도 불을 밝혔고, 편전 바깥에는 화천군 심정 등이 앉아 있었다. 승지들 몰래 중종이 대신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왕은 대사헌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실록). 조광조 등은 영문도 모른 채 투옥됐다. 사흘 뒤 누군가 이 사건의 실체를 조사해 이미 귀양길에 오른..

역사와 현실 2020.12.17 0

보신각, 시간을 널리 알리는 집

1395년, 조선 태조는 운종가(현 종로1가)에 누각을 짓고 큰 종을 달았다. 아침저녁 종을 쳐 백성에게 시간을 알렸다. 조선 최초의 종각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종각이 불타자 건물을 새로 짓고 사찰의 범종을 옮겨 달았다. 그 뒤로도 종각은 누차 화재를 겪고 자리를 옮겼지만, 그 종은 변함없이 도성 사람들의 시계 노릇을 했다. 이른바 ‘보신각 종’이다. 종각에 보신각 이름이 붙은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고종 시절 붙인 이름..

역사와 현실 2020.12.10 0

[여적]6·10만세운동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因山·황제의 장례)일인 1926년 6월10일 오전 8시30분. 장례 행렬이 지나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중앙고보 학생 3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000여장을 뿌린 게 시작이었다. 이후 관수교·을지로·동대문·동묘 등 서울 시내 8곳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이어졌고 금세 전국으로 번졌다. 고창·원산·개성·홍성·평양·강경·대구·공주 등지에서 항일 시위가 일어났다. 19..

역사 칼럼 2020.12.09 0

기본소득과 조선시대 개혁

코로나19 대응책으로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은 몇 가지 중요한 사회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그중 아마도 나중까지 기억될 것은 한국 사회에 기본소득 문제를 본격화시킨 점일 것이다. 기본소득이 긴급재난지원금 때문에 구체화된 것은 다소 우연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은 드물지 않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본소득 개념이 똑같지는 않다. 청년들에게만 주자는 의견도 있고, 형편이 어려운 가구들에 대..

역사와 현실 2020.12.03 0

잠자리까지 통제한 중세 교회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는 남녀 간 사랑이 아무런 도덕적 윤리적 법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같은 사람과 오래 사귀거나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행위는 오히려 이상한 행동으로 취급받는다. 매일 새로운 상대와 만나고 관계를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관례인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너무 파격적이어서 아직은 우리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워 보인다. 멋진 신세계에서의 성은 역사 속에서 성을 오랫동안 억압해온 것을 뒤집..

역사와 현실 2020.11.26 0

세종의 마음 씀씀이

조직을 지키려면 ‘충신’이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세종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려가 망할 때 충신과 의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왕은 늘 마음이 불편하였다(실록, 세종 13년 3월8일). 고심 끝에 세종은 고려의 충신을 현양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당대 최고의 역사가 설순과 더불어 고려 말 여러 인물의 행적을 따져보았다(세종 12년 11월23일). 설순은 길재를 뛰어난 충신이라고 손꼽았다. 그러면서도 그 학문은..

역사와 현실 2020.11.19 0

동포의 명암

‘동포’는 한배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한서>의 ‘동방삭전’에 처음 보이는데, 주석에 “친형제를 말한다”라고 했다. 한배에서 안 나와도 친한 사이를 형제에 비유하곤 한다. 공자의 제자 자하는 말했다. “군자가 공손하고 예의바르면 천하 사람이 모두 형제다.” 여기서 군자는 완벽한 인격자라는 도덕적 의미보다 사회 지배층이라는 계급적 의미가 강하다. ‘천하 사람’ 범주에 일반 백성은 포함되지 않는다. 군자의 형제..

역사와 현실 2020.11.12 0

이이와 김육

율곡 이이(1536~1584)와 잠곡 김육(1580~1658)은 조선시대에 국정운영의 원칙을 세우고 모범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들이다. 자신들은 몰랐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이어져 있다. 이이는 조선 최대 세금제도 개혁인 대동법의 개념을 설계하고 그 필요성을 처음 주장했고, 김육은 그것을 입법해 현실에서 작동시켰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시점에 두 사람의 정치적 성과는 크게 달랐다. 이이는 실패했고, 김육은 성공했다. 근본적으로..

역사와 현실 2020.11.05 0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

얼마 전 프랑스에서 2015년 무함마드를 풍자한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을 소재로 표현의 자유에 관한 수업을 했던 역사교사 사뮈엘이 체첸 출신의 18살 소년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교사가 무함마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했고, 살해 현장의 목격자들은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면서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고 전했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서 저항하다 경찰의 총에 맞..

역사와 현실 2020.10.29 0

정조는 냉철한 현실주의자

정조는 어려움을 이기고 왕이 되었다(1776년). 그에게 큰 걱정이 있었는데 많은 백성이 생계를 꾸리지 못할 만큼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정조가 반포한 ‘윤음’(담화문)엔 왕의 고뇌가 여실히 담겨 있다. 가엾은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싶으나 불가능하니, 조세라도 공평하게 부과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홍재전서>, 제26권) 시일이 흐르자 왕의 생각은 달라졌다. 정조 20년(1796) 가을, 왕은 말하였다. “경작지를 9등급..

역사와 현실 2020.10.22 0

[역사와 현실] 흉년에 소금을 굽다

며칠 전 아내와 동네 마트에 갔다가 배추값을 확인하고는 기겁을 했다. 손바닥을 모아 편 것보다 조금 더 큰 배추 가격이 6600원이었다. 과일값도 높아서 작아 보이는 포도 한 송이가 4000원이었다. 올여름 내내 여러 번 태풍이 지났고 비가 많았기에 빚어진 일이다. 채소와 과일값이 평년보다 훨씬 높아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부담스럽지만,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거나 나라가 위태로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와 현실 2020.10.08 0

[역사와 현실]교황이 고려왕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1333년 교황 요하네스 22세가 고려의 왕에게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2016년 9월 무렵이었다. 한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교황이 고려의 충숙왕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 편지가 사실이면 우리 역사에 굉장히 중요한 발견일 것이라는 전문가의 인터뷰도 함께 실려 있었다. 이후 이 이야기를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영화 <직지 코드>(2017)와 김진명의 소설 <직지: 아모레 마네트>(2019)까지..

역사와 현실 2020.09.24 0

전봉준과 박영효

1894년 11월 박영효가 내부대신이 됐다. 얼마 후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울로 끌려오자 박영효가 직접 심문했다고 한다. ‘위로부터 혁명을 일으킨’ 인사가 ‘아래로부터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을 다그치는 진풍경이었다(오지영의 <동학사>). 그들이 만나자 엄청난 설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편의상 3회전으로 정리해볼 수 있는데, ..

역사와 현실 2020.09.17 0

진실을 외면하는 정부

진나라 환관 조고가 자신의 권력을 시험하려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 호해에게 사슴(鹿)을 바쳤다. “이것은 말(馬)입니다.” 사실대로 사슴이라 말한 신하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뒤로는 아무도 조고에게 바른말을 못했다. 사자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유래다. 조고의 행태는 일찍이 예견된 것이었다. 진시황이 지방을 순행하다 갑자기 사망하자 조고는 진시황의 죽음을 감추고 얼음을 가득 채워넣어 시신의..

역사와 현실 2020.09.10 0

언론은 정부보다 더 공정한가

정상적인 사회라면 언론은 늘 정부보다 공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실제로 늘 그렇지는 않다. 보편적인 일은 시대가 바뀌어도 다른 모습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조선왕조의 정치는 대신(大臣)과 언관(言官)이라는 두 축으로 움직였다. 대신은 정승과 판서를 말한다. 이들의 책무는 한마디로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다. ‘판서’는 한자로 ‘判書’라 쓰는데, 사안을 판단해 사인(signature)하는 사람이라는..

역사와 현실 2020.09.03 0

때아닌 인육 소동

돌발적인 사건은 어느 시대든 일어난다. 이것은 태평성대라고 하는 세종 때 일로 이계린이 황해감사에 임명되었다. 임지로 떠나기 직전 그는 조정에 재정지원을 요청했는데, 황해도는 이미 수년째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계린은 현지 사정이 무척 열악해,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했다(<실록>, 세종 29년 11월15일). 말을 전해 들은 세종은 깊은 충격에 빠졌다. 즉위 초부터 백성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역사와 현실 2020.08.21 0

격식과 실용

1884년 윤5월, 고종은 복식 제도 개혁안을 발표한다. ‘갑신의제개혁’이라고 한다. 복식의 간소화와 단일화를 지향하는 이 개혁안은 서구와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전통 복식의 불편에 눈을 뜬 결과였다. 급진개화파는 양복 도입을 바랐지만 당시로선 시기상조였다. 복식 개혁을 영향권 탈피 시도로 의심하는 청나라의 눈치도 봐야 했다. 결국 개혁안은 전통 복식을 약간 수정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공식 행사복인 ‘조복’, 제사..

역사와 현실 2020.08.13 0

신라의 수도 이전 시도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삼국통일 후 즉위한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은 689년에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 즉 지금의 대구로 옮기려 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다. 신문왕이 수도를 옮기려 했던 이유는 지금 봐도 이해할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 영역을 아우르게 된 신라의 수도로 경주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다. 수도로 기능하려면 위치가 대구 정도는 되..

역사와 현실 2020.08.06 0

[여적] 문화재가 된 ‘활쏘기’

<최종병기 활>은 조선 신궁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이다. 병자호란으로 누이가 포로로 잡혀가자 주인공 ‘남이’는 활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단숨에 적의 숨통을 끊는다. 애국심에 호소한 ‘국뽕 영화’이지만 잊혀져간 활쏘기 무예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우리 민족이 유난히 활을 가까이 했다는 점은 고구려 벽화 ‘수렵도’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민족을 뜻하는 동이족을 ‘동쪽의 큰 활잡이’ 종족으로 풀..

역사 칼럼 2020.07.31 0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용과 거부

한때 세계사 교과서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켰다는, 관행적으로 사용한 표현이 있었다. 구체적 내용이나 맥락에 대한 보충설명이 없다면 이 문장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신앙은 기독교를, 이성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학문을 상징한다. 조금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중세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학문을 신앙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천년 넘게 배제..

역사와 현실 2020.07.30 0

[역사와 현실] 이익이 들려준 이순신 이야기

성호 이익의 글은 명쾌하고 분석적이라서 읽을 때마다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성호는 이순신에 관해서도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몇 차례 거듭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데, 특히 서너 가지 점에서 정말 탁견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이순신을 조정에 추천한 이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8세기에는 서애 류성룡이 왜란 때 정승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며 호평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성호는 거기서 한발..

카테고리 없음 2020.07.23 0

[여적]강산무진도 vs 촉잔도권

2009년 10월 초 국립중앙박물관은 13년 만에 일본에서 건너온 ‘몽유도원도’를 보려는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2005년 용산중앙박물관 개관전에서는 8년 만에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작품이 주목을 받은 것은 두루마리 대작으로 실물 공개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는 길이가 11m, 세한도는 15m에 달한다. 그러나 이는 감상을 적은 발문(跋文)을 포함한 것으로 순수한 그림..

역사 칼럼 2020.07.22 0

조선시대 성교육

<천자문>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도 ‘하늘 천, 따 지’ 정도는 알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아예 <천자문>이 뭔지 모른다. <천자문>을 마치고 이어서 읽었던 <동몽선습> <격몽요결> <소학> 같은 교육용 필독서 역시 알 턱이 없다. 세상이 변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가르치던 것과 똑같은 식으로 가르치는 과목이 딱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성교육이다. 조선시대 성교육의 구체적인 수업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기..

역사와 현실 2020.07.1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