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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면 자주 듣는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임신 막달에 배가 너무 불러 위산이 역류하고 누워도 불편하여 잠을 잘 잘 수가 없었다. 이를 가지고 하소연을 하면, “그래도 배 속에 있을 때가 편한 줄 알아라”라고 위로인지 뭔지 잘 모르겠는 말을 해 주는 상황 같은 것 말이다. 출산을 하고 나면 정말 더 힘들어지나? 확실히 몹시 괴롭긴 하였다. 밤낮이 바뀐 아이는 밤에 1시간 간격으로 깼다. 아직 젖 빠는 힘이 약한 아이는 30분쯤 걸려서 종이컵 반도 안 되는 분유를 간신히 먹고는 30분 까무룩 잤다 다시 깨곤 했다. 등판에 센서라도 달렸는지 눕히기만 하면 바로 깼기에 그 30분 잘 때도 품에 안은 채로 나도 같이 조는 수밖에 없었다. 출산 직후라 손목도 아프..
여행갈 때 뭘 가져가나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행갈 때 뭘 가지고 갔을까. 어디에 가서 뭘 봤다는 기록은 많아도 뭘 가지고 갔다는 기록은 드물다. 최대 분량의 개인일기인 황윤석의 에 단서가 있다. 1766년 황윤석이 고향 흥덕(전북 고창)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갖고 간 물건 목록이다. 도포 두 벌, 적삼 세 벌, 버선 세 벌, 바지와 속옷 여러 벌, 한여름인데 겨울옷까지 가져갔다. 비를 대비해 삿갓과 비옷도 챙겼다. 짐 한쪽을 차지한 세면도구와 구급약은 지금도 여행자의 필수품이다. 선비 아니랄까봐 안경, 종이, 붓, 먹, 벼루에 책도 여러 권 넣었다. 심지어 베개와 이불, 요강까지 가져갔다. 조선시대 주막은 침구를 제공하지 않았으니까. 이쯤 되면 혼자 힘으로는 무리다. 나귀에 싣고 갔거나 노비를 시켜 운반했을 것이다. 황윤석의 ..
퇴계 이황의 향립약조 이황은 56세 되던 1556년에 ‘향립약조(鄕立約條)’를 지었다. 이것이 후일 ‘예안 향약’으로 불리는 예안 지역의 향약(鄕約)이다. 예안은 오늘날 안동시 예안면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안동과 별개의 행정단위인 예안현이었다. 이황은 10여년 전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고향 예안에 돌아와서 저술에 매진했다. ‘향약’은 흔히 계급적 관점에서 이해된다. 양반들이 자신들 삶의 공간에서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가능한 해석이고, 그런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향립약조’의 내용은 이런 맥락과 많이 다르고 오히려 정반대이다. 알려져 있듯이 향약의 대표적 내용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敎), 환난상휼(患難相恤)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규제하..
‘일본사 시민강좌’를 기다리며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학회도 온라인으로 해야 하던 어느 날, 한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먼 지방에 계시면서도 매달 열리는 학회에 꼬박꼬박 참석하시던 조용한 분이다. 이번에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념’으로 학회에 기부금을 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학회가 그간 쌓아온 일본사에 대한 연구 성과를 시민들과 나누는 일에 썼으면 좋겠다는 나지막한 부탁과 함께 짧은 통화는 끝났다. 작년부터 일본사학회장을 맡고 있는 나는 학회 임원들과 상의하여 ‘일본사 시민강좌’ 같은 걸 해보자는 쪽으로 뜻을 모으고, 코로나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사이 경향신문에 공동 주최 의사를 타진했는데 흔쾌히 응해주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총 10회의 강연회로,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일본사 대중강연 시리즈이..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렌즈 올해 인생 처음으로 장을 담갔다. 모든 건 우연히 본 홈쇼핑에서 비롯하였다. 메주, 소금, 건고추, 대추, 숯에 물까지 보내줄 테니 그냥 그대로 담갔다가 몇 달 후 가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소금도 다 계량해서 보내니 계란을 띄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염도 그대로 딱 하면 된다고 했다. 안 그래도 풍미 좋은 집된장을 몹시 그리워하던 터, 저렇게 쉽다면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나 싶어 과감히 도전에 나섰다. 오산이었다. 메주를 넣은 소금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곰팡이가 피었다. 그 징그러움이라니! 놀라서 여기저기 문의하니 걷어내면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그 순간 정말 궁금해졌다. 이렇게 곰팡이가 피는 걸 보면서도 이걸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 첫 인간은 누군가? 언제쯤 장을 가르나 궁금하여 안내문을 보니..
정치는 밥그릇 싸움 성호 이익이 집에서 닭을 키웠다. 한두 마리가 아니고 여러 마리였다. 닭들은 온 집을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다가 안방까지 침범했다. 방이 더러워지는 것은 둘째치고 세간살이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성호는 손을 휘저어 안방을 점령한 닭들을 쫓아내려 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결국 지팡이를 들고 한 마리씩 때려서 겨우 쫓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팡이를 맞고 쫓겨난 닭들은 다시 슬금슬금 안방으로 들어왔다. 성호가 보기에 닭이 하는 짓은 당쟁과 똑같았다. 관리들은 벼슬과 녹봉을 탐내어 당쟁을 벌인다. 그러다 감옥에 갇히거나 귀양 가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심하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니, 지팡이로 얻어맞을 줄 알면서도 기어이 안방으로 들어오는 닭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리즈 시절’의 정체성 신조어는 언제나 생겨나지만 오늘날은 더 많이 등장하는 듯하다. 그냥 문맥으로만 짐작하고 넘어갔는데, 언젠가부터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뜻을 찾아본다. 그렇게 알게 된 단어가 ‘리즈 시절’이다. 지나가 버린 전성기를 일컫는단다. 그렇다면 ‘리즈 시절’은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유용한 용어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굽히고 들어가지 않은 것을 고구려의 패망 원인으로 드는 학자들이 있다. 흔히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는 신라가 아닌 당나라에 패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당나라와 고구려 관계가 처음부터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당나라 태조 이연은 건국 후 고구려와 대등하게 공존하는 정책을 취했다. 수나라가 여러 차례 고..
일본인은 정말 전쟁을 아는가 저명한 일본사학자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패전 후 일본을 이렇게 회상했다. “신주쿠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주변은 불탄 벌판이었고 검붉게 그은 함석으로 만든 판잣집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세탄 백화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략) 학교에 가보았더니 불타서 내려앉아 거무스름해진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전쟁에 진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아, 일본인의 전쟁 이미지는 역시 이런 것인가’ 하는 이질감을 느꼈다.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부모님이나 여기저기서 듣고 본 전쟁은 이렇게 한가한(?) 것이 아니었다. 적군이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고, 집 안으로 쳐들어올까 벌벌 떨고, 민간인끼리도 서로를 학살하고, 누가 우리 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