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8년(세종 20년) 8월1일 성균관 대성전에서 거행되는 공자 제사를 위해 목욕재계 중이던 성균관 유생 최한경이 ‘홀랑 벗은 몸’으로 동료 정신석과 함께 지나던 부인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세종실록>은 “유생들은 울부짖는 여종 2명을 쫓아냈고 반항하는 여인을 힘으로 억눌렀으며, 부인이 쓰고 있던 갓을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 집 사내종이 성균관에 정식으로 이 사건을 고했다. 그러나 성균관의 자체조사에서 사내종의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홍여강이라는 사대부집 미혼의 여주인’에서 ‘주인집 유모의 딸’로, 끝내는 ‘사대부의 비첩’(여종 신분으로 양반집 첩이 된 여인)이라고 했다. 가해자들은 “성희롱만 했을 뿐”이라고 혐의사실을 일부 인정하는 선에서 진술했다. 그런데 <세종실록>은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했다. 홍여강의 아들(홍우명)의 첩인 소앙이 사헌부에 성균관 유생들을 성범죄 혐의로 고소했다는 것이다. 피해 여인이 관리들의 비행과 부정부패를 수사하던 사법·사정기관인 사헌부, 지금의 검찰(혹은 감사원)에 직접 고소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조선판 미투’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종실록>은 석연치 않은 냄새를 풍긴다. “사헌부에 고소한 소앙도 강간미수라 했다가 나중에는 희롱만 당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자못 의심했다.”

 

소앙이 왜 진술을 바꿨는지는 알 수 없다. 세종 임금조차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이(성희롱)에만 이르지 않을 것”이라 재수사를 명했지만 사헌부는 “거듭된 조사에도 ‘성희롱만 당했다’는 진술은 변함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세종은 소앙을 ‘강간하려고 침핍(侵逼·달려들어 핍박함)한’ 최한경에게 장 80대의 처벌을 내렸다. ‘강간미수범에게 장 100대와 유배 3000리’를 규정한 <대명률> 조항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단순 성희롱보다는 엄한 처벌을 내리는 선에서 마무리한 것이다.

 

1444년(세종 26년) 과거에 급제한 최한경은 이조참판과 성균관대사성을 지낸다. 최한경은 <세종실록>의 편찬에 기사관(춘추관 관리)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범죄 가해자의 화려한 변신이다. 그러나 최한경 사건은 최한경 그 자신이 편찬에 참여한 <세종실록>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는 과연 581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성범죄 혐의로 구설에 오를지 알았을까. 법의 심판을 모면했다고 좋아할 게 아니다. 역사의 포폄을 두려워해야지.

 

<이기환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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