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몹시 시끄럽다. 미국과 중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역전쟁의 와중에 있고, 유럽에서는 아직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계속된다. 또, 영국은 브렉시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모든 것이 안갯속이다. 21세기의 세계는 당장의 이익에만 매달려 있는 실정이다. 원대한 이상과 포부는 이미 오래전에 빛이 바랬다.

 

나는 고개를 돌려 17세기의 조선을 바라본다. 그때는 도덕적 이상 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이 강렬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가 깊었던 그 시절, 경기도 여주에 윤휴라는 선비가 살았다. 그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향약조목(鄕約條目)’을 정했다. 내 식으로 말해, ‘마을공화국’의 이상을 품었던 것이다.

 

훗날 윤휴는 우암 송시열 등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 즉 성리학의 공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그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다. 윤휴가 실천에 힘쓴 마을공화국의 이상을 음미해 볼 생각이다.

 

흥미롭게도 윤휴는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법규를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마을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착취하고, 오만방자하게 굴며, 배신을 일삼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아도 옳은 생각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윤휴는 백호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단히 세밀한 법규를 만들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관계에 관한 법규였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사이, 부부 사이, 나이 든 사람과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지켜야 할 예의 등이었다. 그밖에도 생업에 게으르거나 사회생활에 등한한 것까지도 법규를 통해 통제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범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포함되었다. 가령 농사일을 게을리하거나 장기바둑을 두며 떠드는 것도 처벌 대상이었다. 의복을 사치스럽게 입거나 부모의 장례를 성대하게 모신 것도 마찬가지였다. 또, 약속시간을 어긴다든가, 술주정을 부리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는 등의 작은 실수도 마을공동체는 범죄행위로 보았다.

 

17세기 후반, 윤휴의 마을에서는 사회적 통제가 지나치게 심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그 마을사람들의 심정이 이해될 수도 있다. 마을생활의 실질적인 어려움은 살인이나 상해 같은 중범죄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사소한 잘못이나 나쁜 습성이 되풀이되는 데서 비롯되었다.

 

백호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평생교육의 장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네 마을에서 도덕률이 생명력을 갖기를 바랐다. 그래서 보통은 법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없는 사소한 것까지 마을의 법규로 정했다.  

 

규약을 위반한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백호마을에서는 그것이 심각한 잘못이라고 생각되면 관청에 고발했다. 경미한 죄라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공개적으로 벌을 주었다. 세 번씩이나 벌을 받았는데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면 향약에서 쫓아냈다. 그런 사람은 집안에 큰일이 일어나도 마을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 잘못한 사람이라도 깊이 반성해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면 향약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백호마을 사람들은 궂은일이나 경사 때마다 이웃을 도와주었다. 그에 관한 규약을 한두 가지만 소개한다. 하나. 수재 또는 화재를 당하거나 도둑이 들 경우에는 이웃 마을이라도 모두 달려가 구제한다. 그때는 이엉 다섯 마름, 새끼 스무 묶음, 그리고 서까래 하나씩을 가져간다. 하나. 가난과 중병 또는 재앙 때문에 자력으로 생계를 잇기 어려운 이웃은 함께 도와준다. 하나. 죄 없이 법에 걸려 스스로 무죄를 증명하지 못할 경우에는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호소해서 구원한다.

 

윤휴 같은 큰선비가 백호마을에 살고 있는 한, 누구도 함부로 규약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 마을은 일종의 복지공동체였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도, 갑자기 중병에 걸려 일을 못해도, 백호마을에는 살길이 있었던 것이다. 백호마을은 국가 안의 국가였던 셈이다.

 

17세기 조선사회에는 ‘마을공화국’에 대한 열망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것은 백호마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선비들이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 이상적인 인간관계와 사회질서를 구현하고자 큰 노력을 쏟았다.

 

윤휴의 ‘향약조목’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세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째,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라는 것이다. 윤휴를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은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질병과 가난, 그리고 천재지변으로 생존의 위기에 닥쳤을 때, 마을사람들은 가엾은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다. 둘째, 마을사람들의 연대는 형식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실명(實名)의 개인이 함께 웃고, 함께 땀을 흘리며 일상 속에서 작은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끝으로, 역사 속의 마을은 일종의 평생교육기관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도덕의 가치를 깨닫고, 이를 언행으로 실천하기를 다짐했다.

 

과거는 다 좋았고 지금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오래전에 사라지고만 옛사람의 이상에서도 참고할 것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역사와 현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민왕과 부원배  (0) 2019.03.21
1438년 피렌체 & 2019 하노이  (0) 2019.03.14
윤휴의 ‘마을공화국’  (0) 2019.03.07
한국식 나이를 허하라  (1) 2019.02.28
사건, 사실, 해석  (0) 2019.02.21
중세의 신명 재판  (0) 2019.02.14
Posted by mx2.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