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 있는 메디치-리카르디 궁전에는 15세기 중엽 메디치 가문의 주문으로 베노초 고촐리가 그린 ‘동방박사의 행렬’이라는 벽화가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주문자인 메디치 가문은 너무 속 보이는 짓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동방으로부터 온 세 명의 박사로 비잔티움 황제 요하네스 8세, 동방기독교 총주교 요셉과 더불어 메디치 가문 출신의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로렌초를 그리게 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입장에서는 이 그림을 제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이 기독교 세계 최고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큰 공을 세웠음을 기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협상이란 바로 1438년 피렌체에서 열린 공의회였다. 이 세기의 회의에는 교황과 서유럽 기독교 고위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황제 요하네스 8세와 총주교 요셉을 포함한 600명 이상의 대규모 비잔티움 제국 사절단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지중해 동쪽을 지배하는 그리스 정교의 수장이었던 비잔티움 제국 황제와 서유럽 로만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논의했다.

 

사실 1438년 피렌체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1054년 이후 결별했던 동서방 기독교가 한자리에 모여 다시 통합하는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명시적 목적 외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먼저 교황의 속내가 다른 데 있었다. 1431년부터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되고 있던 공의회에서는 교황의 권력을 축소하고 공의회가 교황을 대신하자는 주장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교황으로선 이러한 공의회주의자들의 기세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교황은 바젤을 피해 제3의 장소에서 자신의 주도하에 동방교회와 회담을 개최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협상의 저쪽 당사자인 비잔티움 황제 역시 곤경에 빠져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던 황제는 서유럽 교황이 이슬람에 맞서 싸울 십자군을 조직해 줄 것을 희망했다. 오랫동안 적대시했던 서유럽 로만 가톨릭과 손을 잡고 교황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것 자체가 황제에게는 명백한 굴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명분보다는 절박한 위기를 타개할 실리를 선택했다.

 

15세기 이탈리아반도의 최고 강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도 비잔티움 제국과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430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그리스반도 내에 있는 식민지를 상실한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지중해 제일 강자로 부상한 오스만 제국을 혼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기독교 연합군인 십자군 결성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베네치아는 회담 성사를 위해 비잔티움 제국의 외교사절들을 분주하게 이탈리아로 실어 날랐다.

 

1434년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메디치 가문 역시 이 회담에서 노리는 바가 있었다. 그들은 교황이라는 든든한 지원 세력을 얻고 비잔티움 황제로부터는 그리스 시장에서의 상업 특혜를 기대했다. 메디치 가문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교황을 도와 비잔티움 사절단의 체류 비용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는 비용까지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회담은 1439년 7월5일 합의문을 만들어냈다. 이를 위해 비잔티움 황제가 교리 논쟁에서도, 로마 교황과 비잔티움 총주교의 위상 문제에서도 모두 한발 양보하면서 문서상으로나마 통일이 달성됐다. 그 대신 서유럽 세계로부터의 군사적 원조라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를 맞이한 것은 환영이 아니라 분노와 적개심이었다. 1204년 4차 십자군 전쟁 당시 서유럽 기독교인들에게 유린당한 원한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이 합의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의 총대주교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합의에 서명한 대표단을 인정하지 않았고 1441년에는 회의에 참여한 성직자들까지도 합의를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합의했던 서유럽 세계의 군사적 원조는 없었고 1453년 천년의 제국 비잔티움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지난달 말 하노이에서 열렸던 북·미 정상회담이 별 성과 없이 끝났다. 남북한 정상들의 판문점회담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 이은 하노이 회담에서 비핵화와 종전선언이 나올 수 있다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 일련의 회담들은 1438년 피렌체 회담과 여러 면에서 닮아있다. 남한과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동아시아 열강도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에 첨예한 관심과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5세기 중엽 기독교 세계의 통합이 쉽지 않았던 것처럼 동아시아 세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 또한 어려운 과제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마 뿌리 깊은 종교적 반감과 증오심이 15세기 기독교 세계의 통합과 협력을 어렵게 만들었듯이 기존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으로는 이 어려운 과제를 풀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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