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수정실록> 20년 3월 기사에는 율곡 이이의 제자 이귀의 상소가 나온다. 스승 이이가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한 비난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상소에 대해서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이때 조정 논의가 성혼, 이이 무리에 대한 공격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선비로서 성혼, 이이와 조금이라도 가까이했던 자는 차례로 배척당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위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이가 사망한 지 이미 3년이 넘은 때였다. 사망 후에도 이이에 대한 공격과 비난은 그칠 줄 몰랐다.


이이는 사망하기 몇 달 전에 심지어 ‘소인(小人)’으로 규정당했다. ‘소인’이라는 말은 당시 평범한 비난의 말이 아니었다. ‘소인’은 설득과 타협이 아닌 배제와 박멸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이이를 공격한 한 동인 측 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이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이것은 공(公)을 내세워서 사(私)를 성취해보려는 계략에 불과했습니다. 애당초 동인과 서인은 생길 때부터 둘 사이에 바름과 그름이 있었을 뿐입니다. 사대부의 공론은 동인이 올바르고 서인은 사악하다고 했습니다. (중략) 이이는 본질적으로 사림은 아닙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귀의 스승에 대한 평가다. 그는 스승 이이가 “하늘이 낸 자질을 가지고도 평생의 포부를 하나도 실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 이이는 살아생전에 자기가 주장한 개혁의 내용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어찌 된 일일까?


이이는 선조 13년 12월에 약 5년에 걸친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조정에 복귀했다. 일찍이 개혁을 주장했지만 임금 선조와 동료, 후배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했다. 조정에 있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골에 있는 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짓고 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는 사이에 몇 차례 대사간 벼슬이 내려졌고, 번번이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조정 상황을 계속해서 방관할 수는 없었다. 당쟁은 더욱 격렬해졌고 민생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조정에 복귀했다. 


이후 3년은 길지 않은 이이 생애의 마지막 기간이다. 그는 49살까지 살지만 12월에 태어나 1월에 사망했다. 47년 남짓을 산 것이다. 그리고 언급했듯이 그 3년의 막바지에 당시 조정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이룬 동인들에게 ‘소인’으로 규정되고 말았다.


이이는 자기 시대를 ‘중쇠기(中衰期)’로 규정했다. 어쩌다가 한 말이 아니다. 조정에 복귀한 직후인 선조 14년 실록 기사에 이이가 자기 시대를 ‘중쇠기’로 규정한 말이 두 번 나온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조정이 나라를 세운 지 거의 200년이 되었으니 이제 중쇠기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노인이 원기가 쇠진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는 데 이른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신에게 망령된 계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신과 상의하여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소서. 대신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고, 사류 가운데 국정현안을 잘 알고 나랏일에 마음을 둔 자를 뽑아서 모든 건의 사항을 다 그 관사에 내려서 상의 확정하여 잘못된 정치를 개혁한다면 천심을 거의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설사 이제 공자와 맹자가 곁에 있다 하더라도 재능을 발휘할 데가 없다면 무슨 보탬과 이익이 있겠습니까.”(<선조실록> 14년 10월16일) 그러자 선조는 “경제사를 설치하면 나중에 반드시 큰일이 생길 것이다”라며 이이의 제안을 즉각 거부했다.


그런데 이이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가 선조의 반대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목표로서의 개혁과 그 수단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었다. 


이이는 개혁을 위해서 동인과 서인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인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조정에서 서인이 완전하게 축출되기를  원했다. 


동인의 지도급 인물들도 표면적으로는 개혁의 필요성을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실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당파적 관심이 훨씬 강했다. 류성룡은 당파적 입장이 심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이이의 재주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이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의논하는 이들은 (개혁을 위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것을 핑계대고 매번 개혁 논의를 막고 있습니다.” 이이는 또 이렇게 고백했다. “한 가지 의논을 내기만 하면 온갖 비방이 즉시 뒤따라서, 아무리 애를 써도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몸은 수고로워도 직무는 수행되지 않았다.” 이이는 이 말을 한 후 1년 후 갑자기 사망했다.


이이 사후 약 150년 뒤에 태어난 성호 이익은 조선에서 경세(經世), 즉 올바른 국정운영을 아는 사람으로 이이와 반계 유형원을 들었다. 유형원이 자신의 책 <반계수록>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은 이이였다. 


하지만 이이는 결국 당쟁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공자와 맹자가 곁에 있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개혁은 늘 쉽지 않았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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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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