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지(太原誌)>는 한국 고전소설사에 보기 드문 판타지 소설이다. 원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던 시기, 중원 수복을 갈망하는 호걸 임성(林成)은 동지들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이들은 요괴가 사는 아홉 개의 섬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낯선 대륙에 도착한다. 그 대륙의 이름은 태원, 중국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다. 태원의 면적은 사방 10만리, 그러니까 15억㎢가 넘는다. 지구 면적이 5억㎢이므로 애당초 불가능한 설정이지만, 어쨌든 스케일만큼은 대단하다. 참고로 <반지의 제왕>의 무대인 중간계는 유라시아 대륙(5400만㎢)과 비슷하고,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는 웨스테로스 대륙은 고작 750만㎢이다. <태원지>는 주인공 임성이 이 거대한 대륙을 통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태원에는 목화토금수 다섯 나라가 있고, 각국은 동서남북중 다섯 진방(鎭方)으로 이루어졌다. 진방마다 100개의 주(州), 주마다 100개의 군현(郡縣)이 있으니, 태원의 군현 총수는 25만개다. 당시 중국의 군현 총수가 1000개 남짓이었다. 전투신의 규모도 남다르다. 소설 막바지에서 임성이 토국 정벌을 위해 동원한 군사가 무려 250만명이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능가한다. 전투 참가 인원이 수만명에 불과한 <반지의 제왕>과 <왕좌의 게임>은 명함도 못 내민다.


그런데 이상하다. 태원의 목화토금수 다섯 나라는 누가 봐도 오행(五行) 사상의 산물이다. 중국과 아무런 접촉도 없었던 태원이 어째서 중국의 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이상한 점은 또 있다. 태원 사람들은 공자와 맹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유교 윤리에 충실하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벗과 의리를 지킨다. 태원의 각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군주에 의해 다스려지며, 행정구역도 중국과 별 차이가 없다. 중국에서 온 임성 일행은 태원 사람들의 언어와 문자, 의식주에서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다. 태원이 중국을 닮았기 때문이다.


<태원지>의 작자는 200년 전 조선 사람이다. 세상 만물이 목화토금수 다섯 원소로 이루어졌다는 오행 사상이 아니고서는 세계의 구성 원리를 달리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교 이외의 지배 이념도, 군주제 이외의 정치형태도 상상 밖이다. 태원이 중국을 닮은 이유가 이것이다. <태원지>는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 <스타워즈>가 대단한 상상력의 산물 같아도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가상세계의 모습은 현실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도 인간을 닮았다. 외모는 조금 다를지언정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인간처럼 사랑하고 미워한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세계는 인간이 사는 세계를 닮을 수밖에 없다.


신이 인간의 모습을 닮은 것도 상상력의 한계 탓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의 모습을 닮은 이유는 무엇일까?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신이 자기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인간이 자기 모습을 본떠 신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두려워하던 시기, 신은 해와 달, 산과 강, 범과 곰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부터 신은 인간 모습을 닮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판타지 영화에 비하면 <태원지>의 세계관은 유치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닮은 가상세계를 상상하는 것도 아무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태원지>가 한국 고전소설사에서 독보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것이 상상력의 한계다.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다른 모험가들이 인도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항해할 때 콜럼버스는 혼자 서쪽으로 떠났다. 애초의 목적이었던 인도행 신항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신 신대륙을 발견했다. 누군가 그의 성취를 폄하하자 달걀을 깨뜨려 세워보여 발상의 전환을 강조했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오늘날 혁신을 폄하하고 거부하는 이들에게도 유효하다.


10월 29일 오전 서울 시내를 ‘타다’ 차량과 택시가 나란히 있다. 지난 28일 검찰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이재웅 쏘카 대표와 자회사인 VCNC 박재욱 대표를 불구속 기소했다. 연합뉴스


검찰이 차량호출 서비스 ‘타다’를 기소했다. 어떤 이들은 ‘타다’가 혁신이 아니라고 하지만, 승객을 골라 태우는 택시가 만연한 현실에서 아무 때나 차를 불러타고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건 누가 뭐래도 대단한 혁신이다. ‘타다’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 이유가 이것이다. 법의 사각지대를 이용했다는 비판은 가당치 않다. 택시 아니면 렌터카라는 이분법적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빈곤한 상상력을 탓해야 마땅하다.


정부 관계자들은 성급한 기소라며 아쉬워하지만 검찰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현행법에 따라 수사하고 기소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니까. 문제는 1년이 넘도록 뭉개고 있다가 뒷북 치는 정부 당국이다. 혁신이니 규제혁파니 공유경제니 4차 산업혁명이니 뭐든 다 할 것 같더니, 결국 말뿐이었다. 마음껏 상상해도 현실의 속박은 벗어나기 힘든 법, 고정관념을 버리고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설 때, 세상은 비로소 변화한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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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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