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 문화재가 된 ‘활쏘기’

경향신문 2020. 7. 31. 10:57

<최종병기 활>은 조선 신궁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이다. 병자호란으로 누이가 포로로 잡혀가자 주인공 ‘남이’는 활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단숨에 적의 숨통을 끊는다. 애국심에 호소한 ‘국뽕 영화’이지만 잊혀져간 활쏘기 무예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우리 민족이 유난히 활을 가까이 했다는 점은 고구려 벽화 ‘수렵도’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민족을 뜻하는 동이족을 ‘동쪽의 큰 활잡이’ 종족으로 풀기도 한다. 동이의 ‘이(夷)’ 자를 해체하면 큰 대(大)와 활 궁(弓)이다. 문헌에 보이는 단궁(檀弓:단군의 활), 맥궁(貊弓:맥족의 활)은 활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증거한다. ‘쏜살’ ‘긴장(緊張)’ ‘해이(解弛)’처럼 활과 관련된 어휘도 적지 않다. 옛날 활쏘기에 능한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화살이 버들잎을 꿰뚫는 ‘천양(穿楊)의 명궁’ 정도는 흔했고, 벼룩을 쏘아 관통시키는 ‘관슬(貫蝨)의 신궁’도 있었다고 전한다.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이름은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 창업주 이성계는 궁술로 홍건족 적장을 제압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처음 알렸다.

 

활쏘기는 단순한 무술이 아니었다. 음악, 서예, 말타기 등과 함께 사대부의 필수 교양이었다. 선비들은 <예기>에서 말한 대로 ‘활쏘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큰 덕을 살피고자(射以觀盛德)’ 했다. 활쏘기에 출중했던 조선조 정조 임금은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고,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활쏘기는 경쟁과 양보, 질서 등 공동체 예절을 배우는 학습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곳곳에 사정(射亭·활터)이 있었다. 서울 인왕산 아래에만 5개나 됐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황학정·백호정 등 몇몇 활터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문화재청이 30일 ‘활쏘기’를 국가무형문화재(제142호)로 지정했다. 만시지탄이다. 활과 화살촉을 만드는 궁시장은 이미 반세기 전에 국가무형문화재(제47호)로 지정됐다. 기정인정(己正人正·자신이 올발라야 다른 사람도 바르게 된다), 염직과감(廉直果敢·청렴정직하면서 과감하게 행동하라). 활쏘기 자세를 나타내는 사자성어들이다. 어찌 활 쏠 때만 필요한 자세이겠는가.

 

<조운찬 논설위원 sido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