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때아닌 인육 소동

경향신문 2020. 8. 21. 10:11

돌발적인 사건은 어느 시대든 일어난다. 이것은 태평성대라고 하는 세종 때 일로 이계린이 황해감사에 임명되었다. 임지로 떠나기 직전 그는 조정에 재정지원을 요청했는데, 황해도는 이미 수년째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계린은 현지 사정이 무척 열악해,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했다(<실록>, 세종 29년 11월15일).

 

말을 전해 들은 세종은 깊은 충격에 빠졌다. 즉위 초부터 백성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노력했는데 인육 소동까지 벌어지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괴로움에 빠진 왕은 의정부 대신들과 해법을 논의했다. 다들 철저한 진상조사를 주문했다.

 

신임 감사 이계린으로 말하면 세종의 조카사위였다. 세종의 큰누나인 정순 공주의 사위였던 것이다. 조사 결과 이계린은 정순 공주 댁에서 일하는 환관 김한에게서 사람 고기 이야기를 접했다고 했다. 김한은 또 자신의 조카 조수명에게서 들었다는데, 조수명은 얼마 전 고향 황해도를 다녀온 터였다.

 

태평한 시절에 어찌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세종도 대신들도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왕은 한 명의 대신을 특별조사관으로 삼아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얼마 후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세종 29년 11월25일), 인육 소동은 조수명이 지어낸 ‘가짜뉴스’였다. 조정 여론은 안도했으나, 사건이 마무리되려면 의금부의 심의가 필요했다.

 

마침내 의금부가 최종보고서를 내놓았다(세종 30년 1월16일). 문제의 인물 조수명은 인육 사건을 목격한 바 없고, 그런 유추가 가능한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김한에게 알렸고, 그것이 이계린의 아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와전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였다.

 

의금부는 관련자 전원을 엄벌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가짜뉴스를 만든 김한은 목을 베고, 인육 소동을 전파한 이들도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승지 이계전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이계린의 아우이기도 했는데, 첫째로 인육 소동의 최초 발화자에 대한 수사 결과가 미흡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둘째, 친지에게 소문을 전한 것만으로 중형을 주면 곤란하다고 했다. 끝으로, 이계린이 이 말을 꺼낸 것은 굶주린 백성을 잘 보살피자는 선한 의도였으므로 처벌해서는 곤란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면서 이계전은 역사 기록에 흉년에 사람 고기를 먹었다는 내용이 적지 않은 사실도 환기하고, 수년간의 흉년으로 황해도 인구가 5분의 1이나 줄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침착한 반론에 세종은 마음이 움직여,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감형을 결정했다. 대신들의 의견을 참작해 이계린의 직첩(임명장)은 박탈하면서도, 황해도 백성에 대한 조정의 지원은 대폭 확대했다. 훌륭한 정치가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세종처럼 사태를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라 태도를 유연하게 바꿀 줄 아는 이가 아닐까 한다. 물론 정치가에 한정된 일은 아닐 것이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인데, 고집을 부린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대통령은 눈을 떠 진실을 봐야 한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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