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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만 되던 시대는 갔다 얼마 전 중국 국무원이 ‘중국의 민주’라는 백서를 발간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10개 국가를 모아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여는 데 대한 대응이었다. 한때 중국은 선거, 다당제, 인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인정하면서 서방의 민주주의 공세에 수세적인 자세를 보인 바 있다. 그런데 예상대로 이번에는 ‘민주주의 모델은 하나가 아니다’라며 서구의 민주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고 ‘중국식 민주’를 제창했다. 백서는 국민이 투표할 때만 잠깐 대접받고 나머지 기간엔 냉대받는 현실, 선거로 구성된 의회라는 것이 국민의 대표라기보다는 자본가와 사회 이익단체의 대표라는 사실, 국민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체제지만 그 결과는 포퓰리즘과 불평등, 방역 실패 등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되지는 못하고 ..
동래 할머니 경상도 동래부(현 부산)에 한 여성이 있었는데 극심한 가난을 이기지 못해 몸을 팔아 겨우 끼니를 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선조 25년, 1592). 왜적이 온 나라의 보물을 훔쳐갔는데, 그들은 여성들도 닥치는 대로 붙들어갔다. 동래의 불쌍한 여성은 이미 30여 세도 넘었으나 일본으로 끌려가 10여 년 동안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살았다. 미수 허목이 쓴 ‘동래 할머니’란 글에 이 여성의 기구한 사연이 실려 있다(, 제22권). 선조 39년(1606) 기유년 봄, 조정에서는 일본과 조약을 맺어 억울하게 끌려간 포로를 데려왔다. 다행히 동래 출신인 그 여성도 사신 일행을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던 중에도 자나 깨나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연로한 어머니를 상봉하는 것이었다..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저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자기소개서에 넣으면 반드시 떨어진다는 마법의 문장이다. 인사담당자의 눈에는 진부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모양이다. 물론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는 죄가 없다. 아무렴 기업이 주정뱅이 아버지와 바람둥이 어머니 밑에서 자란 지원자를 선호하겠는가. “우리집은 어려서부터 가난했었고”로 시작하는 신파극형 자소서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따로 있다. 인사담당자는 바쁘다. 성의 없는 자소서를 찬찬히 검토할 여유가 없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점철된 자소서를 보면 표절부터 의심한다. 그리고 기업은 트렌드에 민감하다. 자소서의 트렌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지원자를 어디에 쓰겠는가. 그러므로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로 시작하는 자소서는 쓰레기통으로 직행..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서울역그릴과 ‘Since 1925’의 간극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96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첫 양식당 ‘서울역그릴’이 11월30일 문을 닫았다. 몇 년만 더 버티면 100년인데,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한다. 하지만 서울역그릴의 퇴장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래서 더 아쉽다. 서울역그릴은 1925년 10월 옛 서울역사(驛舍) 2층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옛 서울역사는 1925년 9월 준공되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중앙 건물엔 비잔틴풍의 돔을 얹었고 앞뒤 네 곳에 작은 탑을 세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역사의 처마엔 지름 1m가 넘는 대형 시계를 걸었다. 1층에는 대합실과 귀빈실, 2층에는 이발실, 양식당이 있었고 지하는 사무실로 사용했다. 서울역 건물은 완공 당시부터 화제였다. 특히 양식당 그릴의 인기가 대단했다. 식민지 시대, 근대..
현실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고려 말 가장 큰 개혁 과제도 경제, 즉 먹고사는 문제였다. 당시는 농업이 기간산업이었고 경작지 관련 폐단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가장 적나라한 폐단은 권력을 가진 지배층 일부가 토지문서를 위조해서 남의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기존 권력자들을 밀어내고 등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은 정치 권력만 잃었지, 힘 있을 때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은 땅을 여전히 지배했고, 또 상속했다. 그 결과 본래 자기 땅에 농사짓던 농민들은, 그 땅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여러 주인들에게 일종의 세금을 뜯겨야 했다. 마치 가게를 열어 장사하는 사람이 여러 명의 양아치들에게 돈을 뜯기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상태에서 농민들은 어느 순간 더 이상 농사를 지..
역사교육, 다시 ‘우물 안 개구리’로 유턴? 교육부가 2012년부터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 온 교과목 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동양사학회와 일본사학회를 비롯한 관련학계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는 주로 한·중·일 3국의 역사를 비교사의 시각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교과목 창설 당시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얻은 바 있다. 한국고대사 연구로 저명한 와세다 대학의 이성시(李成市) 교수가 사석에서 ‘한국이 아니고서는 단행할 수 없는 역사교육의 큰 변화’라고 놀라움을 표시한 걸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이전 역사교육은 주로 와 의 틀에서 진행돼 왔는데, 의 주안점은 서구의 역사였다. 그 결과 한국학생과 시민은 영국사나 프랑스사는 대강이나마 알아도 이웃나라인 중국사나 일본사는 낯설어하는 비정상적 상황이 계속되었다. 해방 후 ‘서양만 알아..
안도 다로, 신미양요의 그늘에 숨은 일본의 촉수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들이 벌인 소동은 그보다 4년 전에 일어난 신미양요를 본뜬 것이었다. 1871년 6월, 미국은 조선 원정을 목적으로 군함 5척을 강화도로 파견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지만, 미 군함에는 영어에 능통한 일본 외무성 하급 관리 한 명이 동승하였다. 안도 다로(安藤太郞, 1846~1923)였다. 사건이 벌어지기 석 달쯤 앞서 일본 외무성에서 부산에 주재하던 자국 관리에게 보낸 문서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미국이 군함 몇 척을 그곳으로 파견할 예정이다. 몇 년 전에 해난을 당한 배(셔먼호)를 심하게 다룬 죄를 묻고, 해난구조에 관한 조약을 조선과 체결할 것이라 한다. … 미국에 선수를 빼앗겨서 유감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육식은 죄악이 아니다 채식이 생명을 위하는 길이라는 관념은 고대 인도의 산물이다. 모든 생명은 윤회하므로 동물을 먹는 건 사람을 먹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관념이다. 채식은 괜찮다. 식물은 윤회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육도윤회에 식물은 포함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식물을 생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식물도 생명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고, 피가 튀지 않는다고 생명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채식이 ‘생명’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육식이 악이면 채식도 악이고, 채식이 선이면 육식도 선이다. 요즘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채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모양이다. 하지만 축산업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