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 8

사비니 여인의 납치 사건

고대 로마제국을 이야기할 때 흔히 로마의 평화, 포용성, 선진 문명 전파 등을 언급한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은 로마가 정복한 지역에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경제를 발전시킨 사례로 거론된다. 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적으로 민족의 차이, 문화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들을 모두 감싸안은 보편 제국을 수립한 것은 로마뿐이라면서 로마의 포용력을 칭송한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정복과 피의 대가로 세운 로마의 질서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로마의 역사를 미화하는 저작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던 로마의 초기 역사는 음모, 폭력, 친족 살인, 납치와 강탈 등 야만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역사와 현실 2019.08.29

[여적]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직후 일본은 조선에 강화와 함께 무역재개를 요청했다. 새 집권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 도발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조선인 포로 160여명을 송환했다. 1604년 8월, 조선은 사명대사를 대표로 하는 ‘탐적사(探敵使)’를 파견했다. 사명대사가 일본 국정을 탐색하고 조선 포로 3000여명과 함께 귀국했다. 국교재개에 대한 반대여론은 여전했다. 조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조선왕릉 도굴범 소환, 두 가지를 더 요구했다. 일본이 이를 수용하면서 조·일 국교회복은 급물살을 탔다. 1607년 1월12일, 여우길을 정사로 한 504명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실상의 국교 재개였다. 그러나 사절단의 이름은 종래의 ‘통신사’가 아닌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일..

역사 칼럼 2019.08.26

이순신의 공적

이 나라에는 일제강점기를 몸으로 직접 겪은 분들이 아직 살아계시다. 그분들의 뼈아픈 증언이 있음에도, 일각에서는 엉뚱한 주장을 한다. 그들은 강제징용 자체를 부정한다. 심지어는 ‘위안부’ 역시 당사자가 자의로 선택한 경제적 활동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사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어찌 이런 망발을 할 수가 있는가. ‘임진년의 일을 따져본다(論壬辰事)’는 글을 읽다가 나는 무릎을 쳤다. 세상에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잘못 읽는 일이 과연 허다했다. 내가 읽은 글의 저자는 무명자 윤기였다. 실학자 성호 이익의 제자로, 세상의 잘잘못을 날카롭게 따진 글을 많이 남긴 선비였다. 여기서 소개하려는 글은, 무명자가 70의 나이를 바라보던 1809년경의 저술이었다. 윤기가 살아 있을 때에도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임진왜란..

역사와 현실 2019.08.22

아베의 공과

조선 후기 문인 교와(僑窩) 성섭(成涉·1718~1788)은 경북 칠곡의 시골 마을에서 두문불출하며 독서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곤 주변에 사는 선비 몇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성섭의 학문적 성향은 대개의 영남 선비와 사뭇 달랐다. 그의 독서 범위는 당파를 넘나들었으며, 명·청의 최신 서적도 입수해 읽었다. 광범위한 독서를 바탕으로 국제정세를 조망하는 그의 안목은 놀라울 정도다. 당시 명나라가 멸망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조선 집권층은 여전히 ‘오랑캐’ 청나라가 곧 멸망하고 새로운 한족 왕조가 출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성섭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지배 이념이었던 대명의리론이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이며, 노론의 집권을..

역사와 현실 2019.08.16

화랑도

아버지를 이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신라 문무왕은 681년 56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열왕 김춘추이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이다. 뒤이어 문무왕의 맏아들 신문왕이 즉위했다. 그런데 신문왕 즉위 후 약 한 달 만에 <삼국사기>에 의미심장한 기사가 등장한다. “소판 흠돌(欽突),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는 기록이다. 흠돌, 흥원, 진공 등은 단순한 고위 관료들이 아니었다. 흠돌은 김유신의 딸 진광(晉光)의 남편, 즉 김유신의 사위였고,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이들이 제거된 후 신라 최고위 관직인 상대등과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兵部令)을 겸하고 있던 김군관(金軍官)도 아들과 함께 자결을 명령받았다. 김흠돌 무리의 움직임을 미리 알..

역사와 현실 2019.08.08

정조의 이름이 바뀐 이유

최근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수원 화‘성’과 정조의 이름 이‘성’을 딴 이른바 ‘2개의 성’ 특별전을 열고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알려진 정조의 이름은 ‘이산’인데 어찌 된 것일까. 결론적으로 이산이나 이성이나 둘 다 맞다. 원래 정조의 한자이름은 ‘李’이라 하고 ‘이산’이라 불렀다. ‘’자는 산(算)자의 고어(古語)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임금의 이름과는 발음도 같을 수 없다는 이유로 평안도 이산(理山)은 초산(楚山)으로, 충청도 이산(尼山)은 이성(尼城) 등으로 고쳤다. 그러나 1796년(정조 20년) 정조가 독음의 표준이 된 운서()를 편찬하며 막판 인쇄 단계에서 ‘셩(성·)’자를 뽑아내고 기존 운서에 포함되지 않았던 ‘’자를 그 자리에 꽂아넣었다. 이후 정조의 이름은 ‘이셩(성)’으로 발음됐다. ..

16세기 베네치아의 위기와 기회

1492년 바스쿠 다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이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유럽에서 제일 먼저 전해들은 곳은 베네치아였다. 이 소식은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지중해를 경유하지 않고 향신료의 원산지로 직접 가는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베네치아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었다. 중계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 왔던 베네치아 공화국 천년의 역사에서 최고 위기의 순간이었다. 베네치아에는 부정적인 전망이 넘쳐났다. 한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베네치아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건은 없을 것이라며, 이 소식이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유럽 전역에서도 비관론이 우세했다. 16세기 초 인도양을 여행했던 포르투갈 출신 상인 토메 피레스는 말라카의 주인이 되는 자가 ..

역사와 현실 2019.08.01

[여적]‘재외동포’ 윤동주

중국 지린성 용정시의 윤동주 생가 입구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커다란 표지석과 함께 한글과 중국어로 새긴 ‘서시’ 시비가 있다. 기념물만 보면 윤동주는 중국어로도 시를 쓴 조선족 시인이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는 윤동주를 ‘중국 국적의 조선족’으로 소개한다.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중국 태생이니 중국인이라는 주장은 고구려·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동북공정과 다를 바 없다. 윤동주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중국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중국어로 시 한 편 쓴 일도 없다. 용정중학 학적부와 일제 판결문에 적힌 윤동주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민족의 정서를 시에 담았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

역사 칼럼 2019.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