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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1896년 5월 모스크바에서는 세기의 외교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주요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긴장에 휩싸여 있던 동아시아 각국도 거물들을 파견했다. 청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내정과 외교를 주물러왔던 이홍장이 왔다. 청일전쟁에서 그의 북양함대가 참패하는 바람에 세력은 많이 꺾였지만 국제적으로도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알려진 거물이었다. 일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보냈다. 메이지 정부의 원로로 총리를 두 번 지내며 이토 히로부미와 당시 일본 정계를 양분하던 최고 실력자다. 조선은 민영환을 대표로 파견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해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그 사람이다. 윤치호도 대표단에 있었다. ..

역사와 현실 2021.01.21

작은 일은 작게 다뤄야

남명 조식은 이름난 학자였다. 귀정 이정도 학행이 뛰어난 선비여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아꼈다. 그들은 진주에 사는 진사 하종악과도 밀접한 사이였다. 조식의 여조카는 하 진사의 아내였고, 이정의 첩은 하 진사의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하 진사의 아내인 조씨가 일찍 죽어, 그는 함안 이씨와 재혼하였다. 일설에는 이씨가 이정의 첩과 인척이라고 하였다. 얼마 후 하 진사 역시 사망해 이씨는 과부가 되었다. 어찌 된 셈인지 그 행실이 문란하다는 소문이 들렸다. 때마침 조식의 친구인 이희안의 후처도 남자관계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었다. 경상도 관찰사 박계현이 이정을 만났을 때, 이정은 이희안 집안의 흉한 소문을 전했다. 감사는 깜짝 놀라서 김해 부사 양희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부사가 사위 정인홍에게 그 일을 맡기자,..

역사와 현실 2021.01.14

국민사은대잔치

‘고객사은대잔치’라는 행사가 있다. 기업이 고객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뜻에서 준비하는 이벤트다. 대개는 경품 행사다. 1등 경품은 어마어마하다. 승용차 정도는 보통이다. 한때는 억대의 현금이나 귀금속을 주기도 했다.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비난 탓에 규모가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가의 경품을 주는 행사가 드물지 않다. 그런데 경품은 운 좋은 사람의 차지다. 정작 충성 고객은 아무 혜택도 받지 못한다. 정말 고객을 감사하게 여긴다면 모든 고객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제품 가격을 낮추든지 양을 늘리든지 방법은 여러 가지다. 굳이 극소수만 혜택을 보는 경품 행사를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분은 ‘사은’이지만 목적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홍보 효과다. 고가의 경품은 사람들의 ..

역사와 현실 2021.01.07

‘소학’의 무리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마치 선과 악의 대립처럼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사림이 처음에 훈구세력에게 문제 제기를 했을 때 거기에는 정당한 면이 많았다. 사림이 맞은 역풍이 기묘사화(1519)다. 기묘사화 후 훈구는 사림을 “소학의 무리”라 불렀다. 조롱하는 말이었다. 어느 국가나 건국 후 3세대 정도가 지나면 지배집단 내부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난다. 조선은 세종이 사망한 1450년 무렵이 그때였다. 탁월한 국왕들의 시대가 저물고 엘리트 권력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때 세조가 나선다. 그는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을 잇는 탁월하고 강력한 국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동의했던 관료들은 세조의 공신이 되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

역사와 현실 2020.12.31

기묘사화의 역사적 진실

중종 14년 11월15일 밤, 갑자기 대궐 안이 시끄러웠다.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이 허둥지둥 나가 보았더니, 연추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근정전에도 불을 밝혔고, 편전 바깥에는 화천군 심정 등이 앉아 있었다. 승지들 몰래 중종이 대신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왕은 대사헌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실록). 조광조 등은 영문도 모른 채 투옥됐다. 사흘 뒤 누군가 이 사건의 실체를 조사해 이미 귀양길에 오른 조광조에게 일렀다. 그에 따르면, 남곤과 홍경주, 심정은 흉흉한 예언설로 중종을 불안에 빠뜨렸고, 사건 당일 밤 신무문을 통해 궐내에 들어와 중종과 함께 거사계획을 논의했다. 이후 그들은 궐 밖으로 나왔다가 연추문으로 다시 들어가 조광조 등을 대역죄로 고발했다(실록, 중종 14년 11월18..

역사와 현실 2020.12.17

보신각, 시간을 널리 알리는 집

1395년, 조선 태조는 운종가(현 종로1가)에 누각을 짓고 큰 종을 달았다. 아침저녁 종을 쳐 백성에게 시간을 알렸다. 조선 최초의 종각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종각이 불타자 건물을 새로 짓고 사찰의 범종을 옮겨 달았다. 그 뒤로도 종각은 누차 화재를 겪고 자리를 옮겼지만, 그 종은 변함없이 도성 사람들의 시계 노릇을 했다. 이른바 ‘보신각 종’이다. 종각에 보신각 이름이 붙은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고종 시절 붙인 이름인 듯한데, 고종이 직접 붙였다고도 하지만 증거는 없다. ‘보신’ 의미도 분명치 않다. 혹자는 방위에 맞춘 이름이라 한다. ‘인의예지신’은 각기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데, 동쪽에 흥인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홍지문이 있으니, 도성 가운데 자리한 종각의 이름에 ‘신’을..

역사와 현실 2020.12.10

[여적]6·10만세운동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因山·황제의 장례)일인 1926년 6월10일 오전 8시30분. 장례 행렬이 지나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중앙고보 학생 3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000여장을 뿌린 게 시작이었다. 이후 관수교·을지로·동대문·동묘 등 서울 시내 8곳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이어졌고 금세 전국으로 번졌다. 고창·원산·개성·홍성·평양·강경·대구·공주 등지에서 항일 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한 전국적인 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이다. 이 운동은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선 1929년 11·3광주학생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 폭압 탓에 스러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는 점..

역사 칼럼 2020.12.09

기본소득과 조선시대 개혁

코로나19 대응책으로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은 몇 가지 중요한 사회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그중 아마도 나중까지 기억될 것은 한국 사회에 기본소득 문제를 본격화시킨 점일 것이다. 기본소득이 긴급재난지원금 때문에 구체화된 것은 다소 우연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은 드물지 않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본소득 개념이 똑같지는 않다. 청년들에게만 주자는 의견도 있고, 형편이 어려운 가구들에 대해서만 기준을 정해 소득을 보전해주자는 의견도 있다. 큰 파급효과가 예상되는 정책에 대해 이런 논란이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보수정당’이라 자타가 말하는 야당도 최근 기본소득을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은 이제 한국 사회의 확고한 정책 의제로 자리 잡은 듯하다. 한때..

역사와 현실 2020.12.03

잠자리까지 통제한 중세 교회

헉슬리의 소설 에서는 남녀 간 사랑이 아무런 도덕적 윤리적 법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같은 사람과 오래 사귀거나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행위는 오히려 이상한 행동으로 취급받는다. 매일 새로운 상대와 만나고 관계를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관례인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너무 파격적이어서 아직은 우리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워 보인다. 멋진 신세계에서의 성은 역사 속에서 성을 오랫동안 억압해온 것을 뒤집어보기 위한 과감한 상상일 것이다. 유럽 역사에서 특히 성에 대해 억압적인 자세를 취했던 시대는 중세였다. 중세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음욕은 구원 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7죄 중 하나였고, 성욕은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철저하게 단죄해야 할 육체적 죄악이었다. 중세 교회가 성에 대해 억압적..

역사와 현실 2020.11.26

세종의 마음 씀씀이

조직을 지키려면 ‘충신’이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세종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려가 망할 때 충신과 의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왕은 늘 마음이 불편하였다(실록, 세종 13년 3월8일). 고심 끝에 세종은 고려의 충신을 현양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당대 최고의 역사가 설순과 더불어 고려 말 여러 인물의 행적을 따져보았다(세종 12년 11월23일). 설순은 길재를 뛰어난 충신이라고 손꼽았다. 그러면서도 그 학문은 빼어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세종은 설순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학문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며 행실에 비중을 뒀다. “길재의 충성스러운 행적이 귀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벼슬을 추증하였고, 그 아들에게도 관직을 주었다. 고려의 귀족은 누구나 조선왕조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길재..

역사와 현실 2020.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