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17

(16) 부끄러운 역사 친일 ‘미완의 청산’

ㆍ친일파 죗값 치르긴커녕 기득권 대물림 ‘끝나지 않은 국치’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올해는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식민지 노예로 전락했던 경술국치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데에는 무엇보다 일제의 침략야욕에 일차 책임이 있지만 우리 내부에도 여기에 적극 가담한 친일매국세력이 있었다는 부끄러운 역사를 함께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얼빠진 부류를 제외하고 누구나 친일파를 비난하지만 과연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청산되었는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오른쪽)과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의 얼굴이 함께 나온 기념엽서. 친일파란 일본의 이익과 요구에 따라 적극 협력한 무리를 일컫는다. 일본의 이익과 요구는 시기마다 다르게 등장했고 그 때마다 친일파들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

(15) ‘역사교과서 왜곡’ 왜 끊임없이 이어지나

ㆍ“패권 망상 사로잡힌 日우익, 미래전략으로 교과서 도발” 이신철 |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상임공동운영위원장 2001년 일본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서 만든 역사교과서 한 권이 한·일 양국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면서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양국관계는 역사상 가장 긴밀한 사이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각급 학교의 교과서 검정이 발표될 때마다 양국관계는 위협을 받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교과서 문제는 악화돼 갔다. 일본 우익의 ‘위험한 교과서’는 더욱 많은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가 되었다. 2001년 의 채택률은 0.039%에 불과했다. 그것도 농아학교처럼 비교적 쉽게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공립 특수학교에서 주로 ..

(14)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기나긴 보상투쟁

ㆍ“피폭자는 한·일 어디에 있건 피폭자” 30년 소송 끝 승리 곽귀훈 | 전 원폭피해자협회 회장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10일 전인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과 3일 뒤인 8월9일 오전 11시2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는 사이판 근처의 테니안 섬을 출발한 미군 장거리 폭격기 B29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풍비박산해버리고 말았다. 원자폭탄은 인류가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괴력을 발휘했다. 1초의 몇 만분의 1인 짧은 순간에 섭씨 4000도가 넘는 열선과 각종 방사선, 경이적인 풍압으로 사람과 모든 시설물은 먼지가 되어 암흑세계를 연출했다. 그 뒤 두 도시에선 흰 버섯구름만 피어오르는 광경이 멀리서 바라다보였을 뿐이다. 원자폭탄의 폭발 이후 일본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였던 히..

(13)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70년 망향의 한’

ㆍ‘동토의 땅’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해방뒤엔 ‘잊혀진 존재’로 배덕호 | 지구촌동포연대 대표 이장호 감독, 김지미 주연의 영화 는 일제 식민시기 조선인 ‘명자’가 ‘아끼꼬’ ‘쏘냐’로 불리며 세 나라 국적을 가진 채 기구하게 살다가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머나먼 남사할린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는 게 줄거리다. 영화 주인공처럼 1905년부터 45년까지 당시 일본 땅이었던 남사할린(당시 일본명 가라후토) 전역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망향의 한을 품고 구천을 떠도는 수만명의 조선인 혼령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사할린 돌린스크시 탄광마을 브이코프촌 조선학교 졸업사진. 해방 이후 남사할린 전역에서 운영되던 조선학교는 1963년 소련 행정당국의 폐쇄 결정으로 문을 닫게 되고, 이로부터 25년간 민족의 말과..

(12) 돌아오지 못하는 일제 민간징용자 유골

ㆍ日정부 ‘인간 존엄성’ 인식 부족이 ‘유골봉환’ 최대 걸림돌 고바야시 히사토무 |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장 일제 강제동원희생자 유골 봉환의 어려움은 다른 역사문제와 과거청산이 그렇듯이 일본 사회가 여전히 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유족에게 봉환되지 않은 유골의 대부분은 지시마(千島)열도, 사할린(樺太), 남양(南洋)군도, 중국 등 일본 본토 밖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것이다. 일본 국내에 남겨진 유골은 탄광·토목현장 등에 매몰된 채로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사찰 등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나 기업 어디에서도 1965년 한일회담 이후 반환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미쓰비시 여성 근로정신대원들이 기숙사에서 출근하고 있다. 한·일 두 나라 정부의 유골봉환 노력은 20..

(11) 중국 해남도 ‘조선촌’이 증언하는 일제의 만행

ㆍ형무소서 끌려가 노예처럼 일하다 학살 ‘한 맺힌 유골들’ 사토 쇼진 |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 회장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약 1000㎞ 떨어진 곳에 대만이 있다. 대만에서 서쪽으로 1000㎞ 정도 떨어진 곳에 해남도(海南島)가 있다. 해남도 남단, 중국 하이난성의 싼아(三亞)시 교외 여지구진(枝溝鎭)이란 곳에 ‘조선촌’(朝鮮村)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이 ‘조선촌’에는 지금 조선인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 1943년 봄부터 일본정부·일본해군·조선총독부는 조선 각지의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사람들을 선발해 ‘조선보국대’에 편입시킨 뒤 해남도로 강제연행하기 시작했다. 44년 말까지 ‘조선보국대’는 여덟 차례에 걸쳐 조직되고 약 2000명이 해남도에 강제연행됐다. 2008년 10월 ‘조선촌’ 조선..

(10) 독도문제 본질과 해결 방안은

ㆍ‘영토분쟁’ 부각땐 더 꼬여, ‘역사문제’로 풀어야 실마리 김점구 | 독도수호대 대표 1905년 8월19일, 독도 동도 정상에 작은 건물이 세워졌다. 러일전쟁에서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해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 해군이 세운 독도망루다. 독도망루는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905년 10월24일까지 약 2개월 동안 운영되다 철거됐다. 독도망루는 일본의 군사적 목적 때문에 설치되었고,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첫 번째 일본 영토에 편입된 희생물이었다. 일본은 영토편입에 이은 독도망루 설치를 위해 내무성의 비밀문서(37비을 337호)에 따른 내각회의를 열었다. 내각회의에서는 독도를 주인이 없는 섬으로 정하고, 무주지 선점을 근거로 영토편입 결정을 했다. 내각 결정은 1905년 2월22일의 시마네현..

(9) 사라져야 할 ‘야스쿠니의 어둠’

ㆍ멀쩡히 살아있는데 ‘영새부’ 이름 안지워 ‘살아있는 영령’ 즈시 미노루 | 일본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야스쿠니신사 문제위원회 위원장 ‘우미 유카바(바다에 가면)’라는 시가 있다. 749년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 나오는 시다. 1937년 일본 정부가 국민정신 강조주간을 제정했을 당시 NHK가 ‘국민가요’라는 이름 아래 이 시에 곡을 붙여 처음 방송했다. 노부토키 기요시라는 이가 작곡한 것을 테마곡으로 삼은 셈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라디오로 부대 전멸소식 등을 전할 때 앞부분에 ‘우미 유카바’를 내보내 유명해진 노래다. 그렇게 군국주의의 대표곡이 탄생한다. 2006년 도쿄 촛불행동에서 참가자들이 도열해 ‘노 야스쿠니(YASUKUNI NO)’라는 글씨를 ..

(8) 후지코시 여자근로정신대 끝나지 않은 싸움

ㆍ‘쇠 깎는 공장’ 끌려간 어린 딸들, 아직도 ‘뼈 깎는 고통’ 나카가와 미유키 | 호쿠리쿠연락회 도야마 사무국장 ‘도야마에 올 땐 기뻤네. 하룻밤 지새니 슬퍼지네. 언제쯤 이 공장을 떠날 수 있을까. 아~ 아~ 숨어서 우는 눈물아.’ 65년 전, 공장 인근의 다테야마(立山·일본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산)를 바라볼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소녀들이 있었다. 일본 도야마의 군수공장인 후지코시에 ‘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 연행당한 한국인 소녀들이다. 그 피해자들은 지금 한국인 강제연행 소송의 마지막인 ‘후지코시 소송’에서 싸우고 있다.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선반으로 쇠를 깎는 중노동을 하고 있다. | 나카가와 미유키 제공 기계공구 제조사인 후지코시는 1928년 도야마 시에서 창업했다. ..

(7)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ㆍ日권력자들, 천재지변 공포 속 조선인을 정국수습 도구로 ㆍ재일한국인 6000여명 유언비어로 ‘불령선인’ 낙인, 日 자경단 등에 처참히 살해 김종수 | 1923간토시민연대 한국상임대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한 한·일·재일 시민의 네 번째 공동현장연구가 시작되던 2009년 8월11일 새벽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곤히 잠든 연구단원들을 깨운 것은 지진이었다. 몇 차례 호텔을 심하게 흔들어놓자 연구단원들은 사색이 되어 아연 긴장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1923년 9월의 첫날에 일어난 지진 공포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도쿄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도시 바람이 몰려 한낮의 최고기온이 섭씨 40도를 웃돈다는 사이타마현의 기온이 전날 쏟아진 소나기로 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