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44

(44) 고시생

김희연 기자 지난해 고시생과 관련한 씁쓸한 뉴스가 있었다. 서울 신림동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25년차 고시생이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었다. 유서나 타살의 흔적없이 지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 이 남성은 서울의 상위권 대학교 법학과 졸업생으로 지난 25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시험에 계속 낙방한 그는 생의 마지막 무렵에는 마음을 바꿔 법무사 시험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발견 당시 그의 책상에는 손때 묻은 법학 관련 서적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이 40대 중반 고시생의 안타까운 죽음 뒤로 고시에 인생을 올인하는 청춘들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고위공무원 채용제도인 고시제도가 60여년 만에 손질돼 점차 사라질 운명이다. 행정안전부는 행정고시 선발 비율을 2015년까지 50%..

(43) 만화가게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시작은 심부름이었다. 겨우 여섯살, 한글도 못 읽고 팔다리도 짧은 어린 여동생에게 오빠들은 “만화가게에 가서 이걸 빌려와”라며 만화 목록과 돈을 쥐어주었다. 오빠들의 조기교육(?) 덕분에 만화책 제목을 통해 더듬더듬 한글을 익혔고, 만화가게 주인 아저씨에게 착한 모습을 보이면 ‘오뎅(어묵꼬치)’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대인관계의 기본까지 체득했다. 우리나라 만화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이도영 화백의 만평이 1909년 6월2일자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것을 한국 만화의 효시로 꼽는다. 하지만 만화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대여도 해주는 만화가게가 대중화한 것은 50년대 후반부터다. 변변한 놀거리도, 공공도서실도 드물던 60~70년대엔 동네 만화가게가..

(42) TV 인기 드라마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KBS 드라마 가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다. 지난 11일에는 시청률이 44.9%(TNmS 조사 기준)까지 치솟았다. 요즘에는 드라마가 이처럼 회차별 최고 시청률 40%, 평균 시청률 30%를 넘으면 ‘빅 히트작’으로 기록된다. 지난해 큰 인기를 끈 MBC 이나 SBS 도 최고 시청률은 40%대였고, 평균 시청률 은 30%대였다. 드라마가 방영되던 저녁 7시30분이 되면 ‘전국의 부엌에 밥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할 정도로 시청률이 높았던 는 TV 보급률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정도 시청률로는 히트작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았다. 역대 회차별 시청률 톱5로 꼽히는 (KBS) (MBC) (MBC) (SBS) (KBS)는 ..

(41) 아르바이트

김윤숙 기자 yskim@kyunghyang.com 예나 지금이나 ‘아르바이트’ 하면 대학생이 떠오른다. 등록금을 대기 위해서든, 용돈을 벌기 위해서든, 최상류층을 제외한 대부분 대학생들에게 ‘알바’는 필수과목이나 마찬가지다. 기록상으로 학생들이 처음 아르바이트를 한 것은 배재학당에 ‘자조부’라는 시설이 생기면서다. 여기서 학생들은 붓과 구두 등을 만들어 팔았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 더 이상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1930년대 이전까지는 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특별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낮에는 농사나 상공업에 종사하고 밤에 야학을 하던 학생들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아르바이트로 보긴 힘들었다. 1970년대 대학생이 아이들을 모아 그룹과외를 하는 모습. | 경향신문..

(40) 여성의 이름

손동우 기자 sdw@kyunghyang.com ‘영자’와 ‘경아’의 차이는 무엇일까. 1970년대 중반 개봉된 와 은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의 원조 격으로서 각각 조선작과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의 주인공인 영자는 식모, 봉제공장 공원, 시내버스 안내양을 거쳐 ‘마지막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창녀가 된다. 에서 경아는 부유한 중년남자의 후처 등을 거쳐 호스티스로 전락한 뒤 길거리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1970년대 영화 속 여주인공 이름 ‘경아’는 세련된 감성을 반영해 당시 유흥업소 여종업원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영자와 경아는 비슷한 인생경로를 밟았지만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바로 영자와 경아라는 이름이다. 영자는 일제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자(子)’로 끝나는 구시대적 이..

(39) 지하철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너를 다시 만났었지”로 시작하는 그룹 ‘동물원’의 노래가 발표된 것은 1990년이다. 노래 도입부에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올 때의 기계음과 안내방송을 집어넣어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로 평가받았다. 노랫말 속에서 지하철은 세련된 도시의 감수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지만 현실 속 지하철은 아비규환의 전장이었다. 같은 해 2월 구로역, 신도림역 등 서울의 주요 지하철역 20곳에는 신종 아르바이트가 등장했다. 만원 객차 안으로 승객을 밀어넣는 ‘푸시맨’이었다. 당시 서울이 인구 1000만명의 도시로 거듭나면서 아침마다 반복되는 출근전쟁은 신문 사회면의 주요 기사로 다뤄질 정도였다. 콩나물 시루, 지옥철 등 지하철의 별칭도 여러가지였다. 급기..

(38) 여름방학숙제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작심삼일의 법칙은 여름방학에도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3일 만에 후딱 숙제를 끝내고 실컷 놀아야지!” 해마다 반복되는 개학 하루 전날의 극심한 불안감과 몰아치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심이다. 그러나 40여일 후에나 제출할 숙제를 미리미리 해두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많지 않았으리라. 탐구생활 몇 쪽까지, 매일 일기쓰기, 공작만들기 계획은 3일을 못갔다. 아침 7시 기상, 오전 9시부터 숙제와 공부…. 색색으로 예쁘게 꾸민 여름방학 계획표는 제쳐두고 일단은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은 여름방학이면 ‘곤충채집 숙제’를 핑계로 아침부터 날 저물 때까지 쏘다니며 놀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아이들은 여름방학의 대표적인 숙제..

(37) 봉숭아꽃 물들이기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동네 화장품가게에서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학생들이 매니큐어를 고르고 있다. 방학을 맞은 해방감에 빨강, 초록빛깔의 매니큐어로 대담한 도전을 시도하려나보다. 각종 시험과 과외로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으랴. 이해가 되면서도 고운 소녀들의 손톱엔 화학제품보다 봉숭아꽃물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귀밑 1㎝ 머리를 강조하던 엄격한 선생님들도 여름방학이 끝난 후 복장검사에서 봉숭아물 들인 손톱만은 관대하게 봐주시곤 했다. 자연학습을 나온 어린이들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즐거워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단독주택이 대부분이던 시절엔 서울에도 마당에 봉숭아를 심는 집들이 많았다. 해마다 7~8월이면 줄기와 잎자루의 겨드랑이에서 봉숭아 꽃잎이 두세 개씩 ..

(36) 바캉스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또다시 돌아왔다. 1년에 한 번 ‘치르는’ 연중행사 바캉스의 계절이. 치른다고 표현한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바캉스가 여름철 마쳐야 하는 ‘숙제’처럼 돼버린 탓이다. 원하는 때 장기 휴가를 쓸 수 있는 서구 노동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들에겐 여름철이 사나흘 이상 휴가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니 어쩌랴. 바캉스(vacance)는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라틴어로 ‘비어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영어로 방학·휴가를 뜻하는 vacation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를 숭배하다시피하는 한국이지만, 바캉스만큼은 영어 vacation과 holiday를 눌렀다. 왜? 프랑스어가 좀 더 ‘폼’ 나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푸른 바다에 뛰어든 바..

(35) 이발소

손동우 기자 sdw@kyunghyang.com 교과서나 대본소 만화 외에는 별다른 읽을거리 하나 없던 1960~70년대 보통 아이들이 ‘폭넓은 인문교양’을 접할 수 있는 장소는 엉뚱하게도 이발소였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상고머리’ ‘빡빡머리’ ‘니부가리’ 등 갖가지 형태의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깎으면서 극히 초보적인 형태나마 회화, 문학, 동양학 등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이발소의 인문학 교재는 이른바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운 모사복제화였다.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은 어느 이발소에 가더라도 거의 예외없이 걸려 있었다. 우리 농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림 속의 풍경을 보면서 이발소 손님들은 자연스레 서양 회화에 접근할 수 있었다. 러시아 시인 알렉산데르 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