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37

박세리, 가을에 떠난 ‘한국 골프의 나무’

오동잎 지면 가을인가. 이맘때면 어김없이 시즌을 마치고 작별하는 선수들이 이어진다. 올핸 유난히 큰 별 하나가 떠났다. 한국 골프의 개척자이자 전설인 박세리다. 지난 10월13일 LPGA 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1라운드가 끝난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오션코스에는 특별무대가 차려졌다. 박세리는 18번홀 내내 울며 샷을 하고, 500m의 페어웨이도 울며 걸어왔다. “영화 필름처럼 모든 것이 (머릿속을) 지나갔다”는 마지막 홀이었다. 대형 스크린에는 1998년 US오픈 우승 때 ‘맨발의 연못샷’ 영상이 떴다. 외환위기 시절 한국인의 가슴을 뻥 뚫어준 자칭 “내 인생 최고의 샷”이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상록수’ 노래가 흐르자 500여 팬들은 ‘사랑해 SERI’를 새긴 진홍색 목도리를 ..

첫 불명예 퇴진…최경희 전 이대 총장

최근 이화여대 최경희 전 총장(54)만큼 극에서 극을 오간 이는 드물 것이다. 국내 ‘최고 여자대학’의 총장이라는 자긍심을 가졌던 그가 최고 권력자 ‘비선 실세’의 비위 연루 의혹을 버텨내지 못하고 사퇴했다. 최 전 총장은 모범생의 전형이었다. 대구 남산여고를 거쳐 이화여대에서 과학교육으로 학사, 석사를 마쳤다. 미국으로 유학 가서 탬플대 과학교육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창덕여중과 용산중 교사를 거쳐 1994년부터 이화여대 사범대 과학교육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최 전 총장은 경향신문 1997년 5월29일자 19면에 처음 등장했다(사진). 당시 이화여대 과학교육학과 교수던 그는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가 펴낸 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할 수 있는 환경실험과 실천사항을 제안했다. 최 전 총장은 극적이지 않지..

신체의 부자유 넘어선 ‘무한 상상력’ 호킹

불치병, 순애보적 사랑, 천재성, 뛰어난 학문적 성과, 그리고 순탄치 않은 결혼…. 우리 시대 최고의 이론물리학자로 평가받는 스티븐 호킹(74). 그는 움직이는 자유를 박탈당했지만 우주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 뛰어난 과학자로 우뚝 섰다. 그리고 영화 같은 이야기들로 모자이크 된 삶을 살아왔다. 그는 고개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 계단에서 어이없이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반복돼 병원을 찾자 의사는 그에게 근위축성측색경화증(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지금 같은 물리학자가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호킹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읽고 쓰는 일에 지금같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강연하고 시험점수를 매기느라 연구를 제대..

형사법정에 서는 롯데가 ‘별당마님’ 서미경

롯데가의 ‘별당마님’으로 불린 서미경씨(57)가 법정에 서게 됐다. 일본에 머물며 소환 조사에 불응한 그를 검찰이 재판에 넘긴 것이다. 서씨에겐 10년 전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94)의 롯데홀딩스 주식 3.21%를 증여받으면서 297억원을 탈세한 혐의가 걸렸다. 신 총괄회장은 “절세”라고 했지만, 그룹 정책본부에 지시하고 홍콩과 싱가포르의 페이퍼컴퍼니까지 끼운 검은 거래였다. 이 탈세액은 출발선이다. 검찰은 최종적으로 탈세와 롯데 일감을 몰아서 받은 배임액이 3000억원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국세청도 그의 부동산과 주식을 압류하기 시작했다. 계산이 다른 서씨 쪽과는 법정 다툼이 불가피해졌다. 22세 때 롯데가의 ‘막내 사모님’을 택한 인생과 부가 심판대에 선 격이다. 서씨는 열 살 때인 1969년 ..

‘DJ 키드’ 김민석, ‘운동권 스타’와 ‘철새정치인’ 사이

“겁 많고 내성적인 내가 험악했던 그 시절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동력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그 애정과 관심을 나를 믿고 고용해준 영등포을 주민들을 위해 온전히 쏟겠습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1980년대 학생운동의 한복판에 섰던 김민석씨(52)가 1996년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서울 영등포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뒤 밝힌 소감이다. 당시 32세였던 그는 당선자 299명 중 최연소였다. 4년 전인 14대 총선 때 28세의 최연소 후보로 나서 경제부총리를 지낸 나웅배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260표 차이로 낙선한 그는 재수 끝에 의원 배지를 달았다. 당시 ‘김대중 키드’로 불린 그는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방송국 뉴..

‘이주노동자 대부’ 김해성 목사의 추락

1996년 6월11일 명동성당 어귀에서 일군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쇠사슬을 목에 감은 채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4만원 받는 노예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여전히 불법체류자로 쫓기고 도움을 준 사람들마저 구속되고 있습니다.” 불법체류 네팔인 부부의 체포를 막던 목사가 구속되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에 항의하고 나선 것이다. 구속된 목사는 김해성이었다. 200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나흘 앞두고 40대 재중동포 한 명이 지하철 선로에 뛰어내려 숨졌다. 그는 석 달 전 입국해 일한 지 일주일 만에 허리를 다쳤는데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의 소지품에서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지폐 몇 장과 함께 명함 한 장이 나왔다. 명함의 주인공은 김해성 목사였다. (..

돈과의 싸움에서 이긴 ‘벤처기업가’ 정문술

많은 젊은이들이 벤처사업에 뛰어든다. 일확천금의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한 부채에 허덕이다 빈손으로 떠난다. 많은 경우 벤처사업을 머니게임으로 착각해 돈놀이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20년 전 경향신문(1996년 12월24일자 1면)에는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당시 58세)의 기사가 실렸다. 정 사장은 ‘96 얼굴, 기술경영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 기사에서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기업을 일군 집념의 기업인이자 회사 주식을 상장시켜 단숨에 1300억원을 거머쥔 주인공으로 소개됐다. 기사에는 그가 제품 개발 실패로 청산가리를 앞에 놓고 자살을 결심했던 고난의 시간이 있었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는 기술분야에는 문외한이었으며 사업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늦은 나이에 창업해 크게 성공함으로써 언론의..

‘강 고집’ 강만수, 벼랑 끝에 서다

이명박 정부 시절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71)은 힘이 셌다. 실세 중의 실세였다. 지금으로 치면 박근혜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감싸기로 국정(國政)을 혼란의 늪에 빠뜨린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 견줄 만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던 강 전 장관은 부작용이 예상되는 경제정책을 밀어붙이기식으로 관철시켰다. 그는 경제주체들과의 소통보다는 자신의 고집을 앞세웠다. 당시 경제관료들 사이에선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 장관의 고집 때문에 나라 경제가 결딴날 지경”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경남 합천 출신인 강 전 장관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1970년 행정고시(8회) 재경직에 수석 합격한 뒤 국세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재무부 세제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의 별명은 ‘강 고집’..

특검도, 특감도 “한계” 곱씹은 이석수

“민정수석도 감찰 대상이다. 명백한 비위 행위가 포착되면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은 결코 없다.” 이석수 청와대 특별감찰관(특감)이 지난해 3월24일 국회 법사위 인사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대통령 친족이나 고위공직자의 ‘특별감찰반’을 가동할 수 있는 민정수석실과 업무가 중복된다는 질문이 꼬리를 문 자리였다. 1년 뒤 맞닥뜨릴 운명을 내다본 말이었을까. 이 특감은 “만약에 숨길 게 있어서 (감찰 대상자가) 거부한다면 수사의뢰가 갈 수 있는 것”이라며 “그 정도 고위공직자가 수사의뢰가 됐다면 그 직무를 계속 수행하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고 말했다. 비록 계좌추적·압수수색 같은 강제수사권은 없지만, “특별감찰관 권한이 결코 가볍지 않다”며 ‘수사의뢰’ 칼을 내비친 것이다. 그 말은 현실이 됐다. 이 특감은 지난 ..

‘번뇌의 불’ 끄고 ‘성찰의 불’ 지핀 현각 스님

“일본 불교는 경직돼 있습니다. 중국은 종교가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 수행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한국 불교는 생활 속에 살아 있어요. 대단히 깊고 심오합니다.” 21년 전, 현각 스님은 한국에 온 이유를 한국 불교가 세속을 떠나 ‘진리의 숲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경향신문 1995년 11월14일자). 가족과 연인, 안락한 미래를 포기하고 이 멀고 먼 이국땅 절간으로 찾아든 그는 최소한 10년간은 이곳에서 수련을 쌓을 작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25년이 흘렀다. 현각 스님은 1964년 미국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속명은 폴 뮌젠. 어려서부터 수행자가 되고 싶어 했다. 가톨릭 중·고교를 나와 1983년 예일대에 입학해 서양철학을 전공했다. 인종차별정책을 펴는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