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66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서울역그릴과 ‘Since 1925’의 간극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96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첫 양식당 ‘서울역그릴’이 11월30일 문을 닫았다. 몇 년만 더 버티면 100년인데,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한다. 하지만 서울역그릴의 퇴장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래서 더 아쉽다. 서울역그릴은 1925년 10월 옛 서울역사(驛舍) 2층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옛 서울역사는 1925년 9월 준공되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중앙 건물엔 비잔틴풍의 돔을 얹었고 앞뒤 네 곳에 작은 탑을 세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역사의 처마엔 지름 1m가 넘는 대형 시계를 걸었다. 1층에는 대합실과 귀빈실, 2층에는 이발실, 양식당이 있었고 지하는 사무실로 사용했다. 서울역 건물은 완공 당시부터 화제였다. 특히 양식당 그릴의 인기가 대단했다. 식민지 시대, 근대..

역사 칼럼 2021.12.03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흥미로운 풍경을 담은 맥주들

얼마 전 유튜브를 뒤적이다 를 다시 들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라디오의 심야 음악프로그램. 다시 들은 건 1981년 9월 어느 날 방송분이었다. 시그널 뮤직에 앞서 광고방송부터 흘러나왔다. “새 시대를 앞서 가는 여러분의 문화방송입니다. 오리엔트 아날로그. 수정 손목시계 오리엔트 아날로그. 오리엔트시계 제공 시보 11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곤 귀에 익은 시그널 뮤직, 이종환 특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두 반가웠지만 시계광고가 특별히 오랫동안 머리에 남았다. 40년 전엔 아날로그라는 용어를 저리 당당하게 광고할 수 있었구나.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오리엔트 아날로그 시계는 지금도 생산되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밀려왔다. 내친김에 유튜브에서 옛날 광고를 몇 개 찾아보았다..

역사 칼럼 2021.11.05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동남사 사진기에 담긴 ‘추억의 흔적’

사진기가 귀했던 1970~1980년대, 사람들은 주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증명 사진, 가족 사진, 백일 사진, 돌 사진. 그 시절의 사진관 사진기는 큼지막한 것이 많았다. 삼각대 위에 사진기 본체(암함·暗函)를 올려놓고 사진사는 검은 천을 뒤집어쓴 채 렌즈를 조절하고 셔터를 누르곤 했다. 그 커다란 사진기가 참 인상적이었는데. 전남 순천시 도심에 가면 동남사진문화공간이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그 옛날의 큼지막한 사진기들이 즐비하다. 사진 관련 박물관 몇 곳에서도 옛날의 대형 사진기를 만날 수 있지만, 순천의 이 공간은 그 의미가 매우 각별하다. 초창기 사진기를 생산했던 동남사가 자리했던 곳이 순천이고, 동남사진문화공간이 그 내력과 흔적을 잘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사의 뿌리는 1940년대..

역사 칼럼 2021.10.08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성냥이 그리워질 때

근대 문물이 가장 빨리 들어온 곳, 인천 개항장. 이곳의 여러 박물관을 둘러보면 유독 두드러진 전시물이 있다. 성냥이다. 조금 떨어진 동인천역 배다리에는 성냥 전문 박물관도 생겼다. 몇 해 전엔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근대기 성냥과 불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렸다. 왜 성냥일까. 한 시절, 인천이 성냥의 메카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성냥공장이 처음 생긴 것은 1880년대 중반. 이보다 10여년 앞서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성냥이 수입되어 사람들을 매료시키자 어느 외국인이 서울 양화진과 인천에 공장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곧 문을 닫았고 1917년 제대로 된 근대식 성냥공장이 인천에 들어섰다. 일본인이 세운 조선인촌(朝鮮燐寸)주식회사였다. 이 회사는 일제강점기 국내 성냥 소비량의 3분의 1을 점유할 정도로 번창했다..

역사 칼럼 2021.09.13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양조장의 추억

지금이야 맥주 브랜드가 넘쳐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비’는 맥주의 대명사였다. 오비맥주의 뿌리는 19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의 기린(麒麟)맥주는 서울 영등포에 맥주공장을 지었다. 그것이 훗날 동양맥주, 오비맥주로 이어졌다. 영등포역 바로 옆 드넓은 공장은 오랫동안 우리나라 맥주의 상징공간이었다. 오비맥주는 1997년 경기 이천으로 공장을 옮겼다. 그러면서 공장 건물과 굴뚝을 모두 철거했다. 일본 삿포로(札幌)는 맥주의 도시다. 삿포로맥주는 1876년 삿포로 도심에 공장을 세웠다. 100여년이 흐르고 1993년 공장을 도시 외곽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공장의 굴뚝과 건물 일부를 살려 문화생활공간으로 바꾸었다. 그 가운데 양조공간은 맥주박물관으로 꾸몄다. 그건 단순한 맥주의 역사가 아니..

역사 칼럼 2021.08.13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광주극장과 원주 아카데미극장

서울 종로3가의 서울극장이 8월31일 문을 닫는다고 한다. 얼마 전 그곳에서 를 보았는데…. 서울극장 폐관 소식을 듣고 광주 충장로에 있는 광주극장이 떠올랐다. 1935년 문을 연 광주극장. 당시 ‘조선 제일의 대극장’이란 찬사를 받으며 호남지역 대표 극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1968년 화재로 극장이 모두 타버렸고 다시 건물을 지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주 광주극장을 다녀왔다. 4년 만이었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3층짜리 건물에 스크린은 여전히 하나. 임검석(臨檢席)도 그대로였고 1950~1960년대 사용했던 대형 영사기 2대도 건재했다. 그런데 전에 없던 자그마한 전시공간이 눈길을 끌었다. ‘만축(滿祝)’이란 글씨가 인쇄된 흰..

역사 칼럼 2021.07.16

[여적]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누구나 한번쯤은 ‘우리나라 국보 1호는 무엇이냐’는 문제를 접했을 것이다. 정답은 물론 ‘남대문’이다. 지금은 숭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남대문은 누구나 기억해야 할 부동의 ‘국보 1호’였다. 그래서 숭례문은 국보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은연중 여겨졌다. 20여년 전 국보 1호 논쟁이 뜨겁게 일었다. 학계 일부가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팔만대장경과 같은 문화재를 국보 1호로 재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격론을 벌였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1호감으로 적당하다는 의견과 숭례문을 국보 1호로 둬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1996년에는 정부가 시민들을 상대로 국보 1호 재지정 여부를 물은 적도 있다. 전국의 남녀 1000명이 여론조사에 참여했는데,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역사 칼럼 2021.02.10

[여적]6·10만세운동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因山·황제의 장례)일인 1926년 6월10일 오전 8시30분. 장례 행렬이 지나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중앙고보 학생 3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000여장을 뿌린 게 시작이었다. 이후 관수교·을지로·동대문·동묘 등 서울 시내 8곳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이어졌고 금세 전국으로 번졌다. 고창·원산·개성·홍성·평양·강경·대구·공주 등지에서 항일 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한 전국적인 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이다. 이 운동은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선 1929년 11·3광주학생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 폭압 탓에 스러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는 점..

역사 칼럼 2020.12.09

[여적] 문화재가 된 ‘활쏘기’

은 조선 신궁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이다. 병자호란으로 누이가 포로로 잡혀가자 주인공 ‘남이’는 활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단숨에 적의 숨통을 끊는다. 애국심에 호소한 ‘국뽕 영화’이지만 잊혀져간 활쏘기 무예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우리 민족이 유난히 활을 가까이 했다는 점은 고구려 벽화 ‘수렵도’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민족을 뜻하는 동이족을 ‘동쪽의 큰 활잡이’ 종족으로 풀기도 한다. 동이의 ‘이(夷)’ 자를 해체하면 큰 대(大)와 활 궁(弓)이다. 문헌에 보이는 단궁(檀弓:단군의 활), 맥궁(貊弓:맥족의 활)은 활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증거한다. ‘쏜살’ ‘긴장(緊張)’ ‘해이(解弛)’처럼 활과 관련된 어휘도 적지 않다. 옛날 활쏘기에 능한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화살이 버들잎을..

역사 칼럼 2020.07.31

[여적]강산무진도 vs 촉잔도권

2009년 10월 초 국립중앙박물관은 13년 만에 일본에서 건너온 ‘몽유도원도’를 보려는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2005년 용산중앙박물관 개관전에서는 8년 만에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작품이 주목을 받은 것은 두루마리 대작으로 실물 공개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는 길이가 11m, 세한도는 15m에 달한다. 그러나 이는 감상을 적은 발문(跋文)을 포함한 것으로 순수한 그림의 크기는 몽유도원도가 38.7×106.5㎝, 세한도는 23.3×69.2㎝에 불과하다. 조선 회화의 진정한 대작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856×44.1㎝)와 심사정의 ‘촉잔도권’(818×85㎝)이다. 불화를 제외한다면 역대 회화 가운데 이들을 능가할 대작은 없다. 두 작품은 조선 후기 ..

역사 칼럼 2020.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