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61

시사PD, 해고자, 그리고 다큐감독 최승호

지난 7일 폐막된 제17회 전주영화제 무대에서 뉴스와 빛의 중심에 선 사람이 있다. 다큐멘터리 을 출품한 독립언론 뉴스타파의 최승호 PD(55)다. 국가정보원의 유우성씨(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을 3년간 추적해 그린 은 올해 신설된 다큐멘터리상과 넷팩(NETPAC·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받았다. 2관왕을 거머쥔 영화엔 “저널리즘 영화의 진수”라는 심사평이 따랐다. 입맛대로 여동생의 자백과 공문서를 조작한 국정원을 고발하고, 30~40년 전 간첩의 멍에를 쓴 피해자들의 고된 현실을 비추고, ‘권력자(김기춘·원세훈)’를 찾아 “왜 그랬느냐”고 마이크 앞에 세운 화제작이었다. 그는 김진혁 감독이 출품한 다큐멘터리 에선 해고된 언론노동자의 한 사람으로도 그려졌다. 김 감독도 EBS PD 출신이다. 강유정 ..

정조 탕평의 종말

정조가 죽자 탕평은 끝났다. 정조의 탕평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것이다. 영조는 왜 탕평책을 폈는가? 붕당 투쟁이 극심한 폐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숙종 때 ‘일진일퇴(一進一退)’ 속에 한 붕당이 집권하면 반대 붕당은 살육을 당했다. 숙종은 조정을 물갈이하듯 판을 바꿨다. 그래서 ‘환국(換局)정치’라 불렀다. 서인이 승리하고, 남인은 몰락했다. 주류가 된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소론은 경종의 왕위 계승을 지켰고, 노론은 그것을 뒤집으려 했다. 노론은 경종의 동생 연잉군을 새 왕위 계승자로 밀면서 네 대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왕위 계승에 성공했다. 그 왕이 바로 영조였다. 붕당의 대립이 이제 국왕을 선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론의 힘을 업고 즉위한 영조였지만 국왕의 운명이 붕당에 의해..

코끼리 이야기

조선 태종 11년, 일본국왕 원의지(源義持)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쳤다.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이라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공조전서를 지낸 이우(李瑀)가 구경 가서 보고는 모양이 추하다며 침을 뱉었다. 코끼리가 화가 나서 그를 밟아 죽였다. 코끼리를 전라도 섬으로 보냈다. “순천부 노루섬에 풀어 놓았는데, 수초(水草)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에 임금이 불쌍히 여겨 육지에서 예전처럼 기르도록 명했다. 육지로 나온 코끼리에 또 사람이 차여 죽고, 코끼리의 식사량이 너무 많았다. 또다시 섬으로 보내졌다. 에 나온 이야기다. 연암 박지원은 중국여행에서 코끼리를 보았다. 기괴하고 거창한 구경거리인지라 ‘상기(象記)’라는 글로 남겼다. 사람들은 길고..

옛 평양을 따라

압록강 너머 평양이 또 있었다. 연암 박지원이 연행길에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鳳凰城)을 지날 때였다. 연암은 그곳이 바로 옛 평양(平壤)이라고 고증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고서…, 만약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말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만약 요동에 또 평양이 있었다고 말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며 꾸짖을 것이다. 요동이 본래 조선의 고지(故地)이며, 숙신(肅愼)·예맥(穢貊)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 조선에 복속했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오랄(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강역(疆域)임을 모르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한사군(漢四郡)을 압록강 안쪽에 국한하여 억지로 여기저기 배치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가운데서 찾는다. 그러다 보니 혹은 ..

관중의 어진 정치

관중(管仲)은 유가(儒家)에서 논쟁적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관중을 의 두 번째 편에서 소개했다. 제나라 왕위다툼에서 관중이 추종했던 규(糾)가 패했다. 함께 규를 추종했던 소홀은 죽었지만 관중은 목숨을 부지했다. 오히려 승자인 제환공에게 포숙아가 그를 천거했다. 관중이 말했다. “포숙아는 나를 염치없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다. 내가 작은 절개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하에 공명(功名)을 드러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재상이 된 관중은 보잘것없었던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곳간이 가득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절도가 있으면 육친(六親)이 뭉치고, 예·의·염·치가 베풀어..

심세(審勢)

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연암 박지원은 중국 기행에서 천하의 대세를 살폈다. 의 한 편인 ‘심세편(審勢編)’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중원을 차지한 청조가 어떻게 중국을 지배하는가. “중국의 동남지방은 개명(開明)한 곳이어서 반드시 천하에 앞서 일이 생긴다. 그래서 강희제는 여섯 차례나 이 지방을 순행했다. 지금의 황제(건륭제)도 다섯 차례를 순행했다.” “천하의 근심은 늘 북쪽 오랑캐에 있었다. 강희제 때부터 열하에 행궁을 짓고 몽골의 강력한 군대를 유숙시켰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대비하는 것이다. 군사비를 덜고 변방이 튼튼해져, 이제 황제가 몸소 머물러 통솔하고 지킨다. 서번(西藩·티베트족)은 강하고 사나우나 황교(黃敎·라마교 일파)를 매우 경외하니, 황제가 그 풍속을 따라 황교를 떠받들고 그 법사..

지식을 지혜롭게

지식이 넘친다. 18세기에도 그랬다. 담헌 홍대용은 “옛날에는 책이 없어도 영웅과 어진 사람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책이 많아도 인재가 날로 줄어든다”고 한탄했다. 당시에 백과전서 형식의 책들이 유행처럼 등장했던 것도 많은 지식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백과사전은 해법이 아니다.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금방 헌 지식더미가 되어버린다. 지식의 수명이 너무 짧아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때그때 필요한 지식을 인터넷 공간에서 찾아 쓰면 된다. 문제는 인터넷 공간의 지식이 바로 내 지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의 지식은 많고 넓어졌지만 내가 아는 지식은 적거나 좁다. 세상은 열려 있지만 얕은 지식을 기초로 편견을 강화하는 지식만 찾아 편식한다. 또 소모적 지식만 뒤쫓느라 소일하기도 한다. 대학자 다산 정..

삼일절에 생각하는 징비(懲毖)

“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후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그 가운데 전란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 것은 그 발단을 밝히기 위해서다. 임진년의 재앙은 참혹했다. 수십일 동안 세 도읍이 함락되고, 온 나라가 무너졌다.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피란했다. 그러고도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하늘 덕분이다….”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왜 을 썼나? ‘징비(懲毖)’였다. ‘징전비후(懲前毖後)’, 즉 “지난 잘못을 거울 삼아 후일을 조심한다”는 취지다. 의 소비(小毖) 편에 나온 구절(予其懲而毖後患)에서 연유한 것이다. 본문의 시작 부분에는 보한재 신숙주(1417~1475)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죽음을 앞둔 신숙주에게 임금 성종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없소?” 신숙주가 대답했다.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진나라가 성공한 까닭

나라의 흥망은 인재가 제대로 쓰이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너무도 평범한 진리다. 다산 정약용의 사론(史論) 가운데 하나인 ‘진지제업(秦之帝業)’도 같은 내용이다. “예나 이제나 진(秦)나라를 말하는 자는 오직 배척할 줄만 알지 마침내 제업(帝業)을 이루었고 거기엔 까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삼대(三代) 이래로 인재 등용에 정해진 틀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인재에 급급했던 나라는(立賢無方 唯才是急) 진나라뿐이었다.” 가혹한 지배 때문이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같은 권력의 농간 때문이었다 등등 진나라의 멸망을 말하면서도, 진나라의 성공은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랜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최후의 승자가 된 데엔 뭔가가 있었다. 바로 인재 정책이었다. 진나라는 외국의 인재도 객경(客卿)으로 영입했..

좋은 장수(將帥) 얻기

역시 장수가 중요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비록 한국 축구대표팀이 우승은 못했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다. 왜 같은 선수인데도 감독에 따라 그토록 달라질까. 어느 감독 아래선 기대했던 스타가 실망스러운 플레이를 하는가 하면, 어느 감독 아래선 신예가 등장하고 베테랑도 다시 뜬다. 나라 간 각축이 치열했던 중국 전국시대에도 그랬다. 같은 조나라 병사이건만 조사나 염파가 이끌면 승리의 군대였고, 조괄이 이끌었을 때는 패전의 군대가 되었다. 좋은 장수를 얻는 것이 승패의 관건이었다. 연나라 소왕이 제나라의 공격으로 망할 지경에 즉위했다. 인재를 모아야만 했다. 곽외에게 그 방책을 물었다. “왕께서 인재를 부르고 싶으면 먼저 저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先從외始). 저보다 현명한 인재들이 어찌 천리길을 멀다 하겠습니까..